태풍이 지나간 자리 곳곳엔 울음을 삼킨 아픔이 있다. 당혹과 허무가 섞이고 소중한 것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가 삶을 절벽으로 밀고 간다. 길바닥엔 부러진 가지와 강제로 떼어진 잎새들이 즐비하다. 제자리를 잃고 빗물에 흠뻑 젖어 떨어진 낙엽들은 밟기도 미안하다. 무사히 지낸 이들의 웃음이 부끄러운 까닭은 그 반대편의 눈물이 있어서다.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가.

생의 고난은 무신론자건 유신론자건, 운명론자건 의지론자건 피할 수 없다. 일찍이 하나님과 함께 살던 에덴을 불순종으로 인해 떠날 때부터 시작된 불행이었다. 

세계 도처에서 재난의 소식이 점점 커가고 있다. 불길한 종말의 예고들이 기후학회와 지구환경학회, 예언자들과 성직자들에게서 들려온다. 음모론도 정통론도 관측 사상 최고점을 찍는 수치에 더욱 힘을 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비교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은 어떤 거짓도 음모도 없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막13:7-8).

전무후무한 대환난이 종말의 때에 있을 것인데, 그 시작은 이런 환난들이 있을 것이란 예언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재앙들은 다 인간의 탐욕과 불의함으로부터 쌓이고 쌓여 그 한계점을 넘어 쏟아진다는 사실이다. 밀림이 파괴되고 빙하가 녹고 만년설이 사라진다. 강은 마르는데 해수면은 높아진다. 더 많은 수확을 바라 뿌린 농약에 수분을 담당하는 벌들이 죽어간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감시용 CCTV가 넘쳐난다. 평화를 위해 강력한 대량살상무기들이 배치된다. 어찌해야 하는가.

놀랍게도 소망은 땅에 있지 않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다. 참된 희망은 그렇게 똑똑하고 복잡한 사람에게 있지 않다. 이토록 가엾고 불행한 사람들을 구하시려는 하나님께 있다. 인류의 어떤 노력도 열띤 회의도 이미 임계점을 넘은 땅을 딛고서는 해결책을 가질 수 없다. 되레 자책을 무마하는 비난의 화살이나 준비할 뿐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수십 번 수백 번 말씀하셨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55:6-7).

“너희를 위로할 자는 나여늘 나여늘….” 너희가 누구에게 가며,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를 원망하는가. 하나님이 그런 것도 막아주시지 않는다 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 재앙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아들 예수님을 화목의 제물로 폭도들에게 내어주신 희생과 사랑 앞에 자비가 있냐고 따질 수 있는가. 이 죄악된 세상과 욕심 가득한 육체에 갇힌 영혼을 구하시려는 하나님께, 어떻게든 영원한 세계로 이끄시려 모순되고 유한한 조건들을 허용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불의함을 추궁하며 분노를 발할 수 있는가.

그러니 대책도 없고 헤쳐나갈 힘도 지혜도 없을 때 내게 남은 유일한 하나가 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이다. 적어도 의식과 눈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일이다. 이는 모든 문제의 답을 얻는 길이다. 주님이 이천 년 전에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신앙인도 종종 길을 잃는다. 때로 원망과 비관이 태풍처럼 불어온다. 의심과 회의에서, 슬픔과 고통에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시간이다. 태풍이 지나가면 더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열린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