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친 후에 어머니께서 “얼굴이 왜 이렇게 야위고 말랐냐? 밥은 먹고 다니는 거냐?”라고 하셨다. “엄마, 염려하지 마세요. 잘 먹고 다니고 있어요.” 아흔이 넘으신 어머니께서 육십이 넘은 아들을 자꾸 염려 하신다. “내가 죽으면 어떡하누. 저렇게 머리도 하얗게 세어서 혼자 어떻게 살아.” “권사님, 왜 이렇게 염려하세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잖아요.” “그려. 그려. 우리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시제.”
어머니께서 내 두 손을 덥석 잡아 가슴에 품고서는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아들 주님의 아들이니 항상 지켜주시고, 사명자의 길 끝까지 잘 가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시는데 주방에서는 아버지가 밥 다 됐다고 계속 부르셨다.
식사를 끝내고 집을 나오는데, 허리가 굽고 다리에 힘이 없으신 어머니께서 마루에 걸터앉아 “좀 더 있다 가지, 모처럼 왔는데 벌써 가?”라며 눈물을 훔치신다. “다음에 또 올게요. 오늘 방문 할 곳이 있어서 가봐야 돼요.” “그래도 그렇지. 제발 밥 좀 많이 먹고 옷 좀 따습게 입고 다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항상 겸손해야 돼. 차 조심하고 이거 가다가 저 수도사님들과 맛있는 거 사 먹어.” 돈을 움켜주신다.
우리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어머니는 그 자리에 꿈쩍 않고 지켜보고 계셨다. 몇 년 전부터 치매가 약간 온 뒤로부터 갈수록 염려가 많아지신 듯하다. 이제 모든 염려나 미련이 없어질 만한 연세임에도 여전히 다 떨치지 못한 염려가 남아 있다. 
우리 삶속에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지금 나라 안팎으로 교회, 가정, 직장, 학교 등 염려와 걱정이 늘어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염려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마6:3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7)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의식주다 보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관심이 많다. 거기에 갖가지 염려들이 따라온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모든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신 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눅12:22)고 하셨다.
염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닥치지 않은 일들을 미리 앞당겨 염려하기도 하고, 쓸데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코로나에 걸리면 어떡하지? 몸이 아픈데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어느 순간에 죽는 것은 아닐까. 늙으면 뭘 먹고 살지.’ 
유월절을 앞두고 한 사람이 랍비에게 와서 말했다. “랍비님, 저는 너무 근심 걱정이 많습니다. 없는 것이 많아 골머리가 아픕니다. 못 살겠습니다.” 랍비는 무슨 근심이냐고 물었다. 그는 유월절이 다가오는데, 무교병 살 돈도 없고, 포도주와 자기 옷과 아내 옷과 자녀 옷은 물론 고기도 살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랍비는 물었다. “무교병은 얼마요?” “5천원입니다.” “포도주는 얼마요?” “1만원이요.” “자네 옷은?” “5만원이요.” “아내 옷은?” “10만원이요.” “자녀 옷은?” “3만원이요.” “유월절 고기값은?” “2만원이요.” 이 말을 듣고 랍비는 조용히 말했다. “이제 자네는 돌아가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지 말고 한 가지 걱정만 하게. 21만 5천원 걱정 하나만 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한 가지만 기도하게. 21만 5천원을 달라고 말이야.”
시카고 러쉬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는 65세 이상의 노인 1064명을 대상으로 걱정 및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조사한 후 3년부터 6년이 경과된 시점에 이들 중에서 누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는지를 조사 한적이 있다. 결과는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에 민감한 사람일수록 노년기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릴 위험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을 의심하는 것이다. 늙고 죽는 것은 우리의 권한 밖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까지 붙들고 걱정하는 일은 시간낭비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스스로를 주저앉히는 물귀신이다. 염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물줄기를 막는다.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잠17:22).
자기를 사랑하면 염려라는 불청객은 반드시 찾아온다. 돈을 사랑하고, 명예와 물질을 추구하며 사는 것 자체가 자기를 사랑함에서 비롯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자랑,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세상 것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근심은 끊이지 않는다.
마지막 때가 가까 올수록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감사치 않는다고 했다. 마태는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씨앗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도 세상 것을 바라보고 의지할 때 근심거리가 생겨나며, 더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더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염려의 원인은 결국 영원한 하늘의 보화보다 땅의 것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나도 사명자가 되기 전에는 많은 근심과 걱정거리를 쉽게 해결하지 못했다. 사람 구실도 못할 것 같아 염려의 보따리를 움켜쥐고 슬픔에 젖기도 하고,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또한 폐결핵으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금식도 하고, 성경도 읽고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어느 순간 돌아서면 염려와 근심으로 밥맛을 잃기도 하고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런데 진리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세상 것을 용감하게 버리길 결단하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염려가 사라졌다.
염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염려는 힘을 잃고 사라진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할수록 걱정은 떠나간다. 사명자의 길을 선택하며 달려가고 있는 나는, 더욱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며 염려가운데 있는 분들을 위로해야 할 사명이 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모하며 달려갔던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양과 기도를 드리며 큰 평안과 기쁨을 누렸다. 그 순간에도 염려를 버리고 고난당하시고 죽음의 권세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늘의 영광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마귀는 염려의 안개로 우리의 영혼을 흐리게 하고, 미세먼지처럼 영혼을 답답하게 하고 불안에 떨게 한다. 염려의 마음이 커지고 깊어지면 우리의 영혼도 오염되어 말씀을 빼앗긴다. 그러다가 말씀을 놓치면 주님에 대한 사랑도 서서히 식어가고 기쁨도 감사도 사라진다. 근심과 염려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려할 권세도 누리지 못하게 하고 마귀에게 우리 삶을 삼킨바 된다.
나의 영적 스승님께서도 하늘나라 가실 때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염려와 걱정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염려가 아니라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어느 순간 우리 삶을 보면 한순간 염려에 빠질 때가 있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과 영성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뜨겁게 사랑할 때 염려와 근심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셨다. 우리 삶도 염려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더 사랑하자. 바람이 불면 하늘이 맑아지듯, 사도 바울처럼, 많은 성경의 위인들처럼, 기도의 바람을 불러 일으켜 근심을 떨쳐버리자. 우리의 모든 문제와 염려를 다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한 걸음씩 힘차게 주님 사랑하는 길로 더욱 나아가자. 우리가 가야 할 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염려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물리치자.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