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아버지
어릴 적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하면,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고 질문하던 기억이 있다.  착한행실의 아이를 키우고 교육한 아버지를 칭찬하고 싶기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마태복음 5장에도 이와 같은 말씀이 나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나의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고 궁금해 하거나 아버지를 칭찬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아버지께 속한 사람들이고, 그 삶을 통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최고의 사명이자 기쁨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구약에서는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에 대해 간음하는 현장이 잡히고 증거가 있어야 죄가 되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만큼 신약의 계명들은 무게감이 크고 엄중하다. 그런데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너희 아버지”란 표현을 많이 반복하신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고 하신다. 말씀들의 주체는 ‘너희 아버지’다. 삶의 행위가 우리의 몫인 것 같지만 그 삶의 무게를 이미 알고 도와주시는 분은 ‘너희 아버지’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를 계속 강조하신다. 너희가 하나님 앞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아버지”는 확실한 자녀됨의 증거요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됨을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명을 따라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어서 거룩해지라고 행위를 질책하고 무섭게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를 거룩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먼저 희생하시고 거룩한 본을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생자를 먼저 희생 제물 삼으실 만큼 큰 사랑으로 인생들을 사랑하신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자녀 되었기에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잊지 말아야 복음의 가르침 안에서 자유하며 십자가의 무거움도 감사와 행복으로 감당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을 반복하신 이유는, 결국 우리 삶에 용기를 주시기 위함이다.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삶을 위한 위로와 사랑의 표현이다. 신뢰의 영역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계명을 주시고 그것을 견디며 승리하도록 돕는 ‘너희 아버지’가 계심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은혜의 부르심
수많은 종교가 자신의 힘과 공로, 금욕적 행위, 수단과 방법으로 도를 닦으며 의로움에 도달하고자 했지만 속사람의 변화를 어쩌지 못해 탄식에 그치고 말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의 선생들이 음욕과 탐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지만 그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가르치는 선생들 역시 부패한 죄성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21-24).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더 어둠의 일을 행하고, 더 탐심가운데 거하고, 보이는 부분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위를 엄중히 경고하셨다. 거짓 선생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오직 행동을 제약함으로 겉만 바꿀 수 있다. 그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존재로 사람을 부르시고, 그 후에 어떻게 살라는 계명을 주시는 분이다.
복음의 원칙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죄 사함과 함께 성령의 역사를 통한 변화를 전제로 한다. 죄에 물든 사람을 빛과 선을 향하도록 변화시키는 힘은, 오직 죄 없으시고 완전하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가능함을 거듭 선포하시는 것이다. 또한 그 은혜를 사모하고 나아가는 자들이 공로를 힘입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과 성령의 생명을 받으라는 것이다. 요한일서의 표현에 따르면 죄를 범할 수 없는 새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하면서 오히려 죄를 양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는 어리석음을 경고하심이다. 너희 아버지는 죄가 하나도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니 그 분을 힘입는 은혜의 삶을 온전히 누리며 나아가라는 용기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녀 됨을 확증하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에 옛 모습은 날마다 죽어간다. 이는 사상도 논리도 아닌 영적인 것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속사람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3-24).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
참된 믿음 즉 새사람이 살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의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나를 신뢰치 않고 주님만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면 속사람이 나의 삶을 통해 나타난다. 이 새사람은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육신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의 생명인 새사람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거룩하여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맺어진 이들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거룩한 명령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사람들이다. 거룩한 성령이 우리를 주장하고 계시니, 새사람을 입기 위하여 옛사람의 모습인 자아를 끊임없이 죽이고 버리며 살아가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계명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때 성령하나님께서 거룩한 능력으로 말씀하신다. “너희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사랑만 할 수 있으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느냐. 이방인과 세리도 그러한 세상적인 사랑은 다들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나타내라고 부탁을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인 증거가 드러나는 것이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게 되는 성화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는 믿음 안에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고,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되는 의지적 노력이다.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 자신을 보게 되면 거룩한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된다. 그러므로 자존심을 내려놓고, 옛사람이 아닌 새롭게 지어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설 때에,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인하게 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스스로도 확증할 수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기를 소망하고, ‘너희 아버지가 누구냐’ 나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일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고 원하고 기도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