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살리는 특효약

마음이 약해지고, 진리가 희미해질 때마다 찾는 특효약이 있다. 바로 예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사셨던 성인(聖人)들의 이야기다. 달려가야 할 목적지가 어디며 영원한 가치가 무엇인지 무척이나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그분들의 삶은, 10년 동안 품어온 내 꿈을 단숨에 놓게 했다. 드높은 목표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지만, 강렬한 빛이 늘 갈 길을 비춰주기에 또 한걸음을 내딛는다. 언제 들어도 뜨거운 감동과 진실한 회개를 안겨주는 성인들의 삶은 정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다.

최근에 읽은 글라라의 전기는 잠들어가던 내 영혼을 깨워주었다. 상류 귀족 가문의 맏딸로, 어머니가 기도하던 중 머지않아 온 세상을 환히 비출 빛을 낳게 될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고 그후 태어났다. 어머니 밑에서 깊은 신앙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배우며 몸과 마음이 아름답게 자랐다. 자라면서 존재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오는 갈망이 있었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은 갈망이었다. 그 갈망은 최소한의 음식으로 만족하며 고요와 고독 가운데 기도하는 삶으로 인도하였다. 그러면서도 일상적인 태도나 가족,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는데 글라라와 대화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로 관심이 향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기도 중에 그리스도께 드리는 참된 봉헌은 자신이 지금 누리는 부와 기득권을 포기해야만 얻어진다는 것을 깨달고 주님께 대한 사랑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리라.’ 다짐하며 열여덟이 채 안 된 나이에 자신의 삶을 봉헌하기로 결심한다. 그 방법을 모색하던 중, 성 프랜시스와의 만남을 통해 종려주일 밤 가족들 몰래 집을 나서게 된다. 가족들은 협박과 횡포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오직 그리스도께 속하였다며 삭발한 맨머리를 보이는 그녀를 아무도 데려올 수 없었다.

글라라의 거룩한 빛에 이끌리어 많은 처녀들이 찾아와 모이기 시작하였고 수도공동체를 형성한다. 자매들은 기존의 수도회와는 전혀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복음을 그대로 살기 위하여 엄격한 봉쇄의 담장과 가난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수도공동체가 시작된 지 3년 후, 오직 순종의 마음으로 힘들고 고생스러운 섬김의 자리인 원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허드렛일은 으레 자신의 몫으로 도맡아 하며, 자매들이 식사하는 동안 시중을 들거나 밖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자매들의 흙투성이 발을 씻어주는 비천한 일을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극기의 실천에 관해 자기에게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자매들에게는 너그러웠다. 자매들 중에 누가 슬픔과 곤경에 빠지게 되면 조용히 불러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온갖 방도를 찾아내어 눈물을 머금고 사랑으로 권면하였다. 병든 자매들에게 십자가 모양으로 손을 그으며 기도하면 즉각적인 치유가 이루어졌다. 기도시간이 되면 제일 먼저 성전에 가서 불을 밝히고,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를 듣지 못한 자매들을 가만히 일으켜주기도 하였다. 삶으로 말을 대신하였다.

한결같이 온 힘을 다하여 저항한 것은 다음날의 생활 대책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수입이라도 보장되어야 수도공동체의 기도와 관상의 삶에 안정과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한계를 긋는 것이 되기에 장래에 대한 보장책을 철저히 거부했다. 내일에 관한 보장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이었다. 가난을 통해 자신을 남김없이 비워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영혼으로 온전히 내어 드리도록 임종 직전까지도 자매들을 향해 간곡히 권면하였다.

자매들은 집이나 장소나 어떤 물건, 그 어느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같이 가난과 겸손 안에서 주님을 섬기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40여 년 생활하는 동안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 잠자리였으며,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으며, 작디작은 빵 조각이 음식의 전부였다. 죽는 날까지 이 모두를 더할 나위 없이 영광이요 재산으로 여기며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기에 힘썼다.

언제부터인가 무심코 생각하다가 시작된 염려가 있다. 장래가 보장되지 않은 생활에 대한 물음표는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갑자기 아프게 되면 어떻게 하지?’ ‘꼭 필요한 물건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지?’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해지면 어떻게 하지?’

결국 내 힘으로 장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누룩이 조금씩 번져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옷이 가득 차고, 간식 보관함이 생기고, 비상금 봉투가 생겼다. 이제 더 이상 마태복음 633절을 읽어도 가슴이 뛰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가장 잘 알고 계셨다.

은혜가 스며들자 내 안의 염려라는 어둠이 물러갔다. 성 글라라의 삶을 내 안에 비추자 다시금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춰졌다.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며 온전한 신뢰를 드리지 못한 것을 회개하며 반성했다. 거룩한 삶을 사셨던 분들의 빛을 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의 길을 가리라 결심했던 그 용기를 다시 기억한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위해 성 글라라가 드렸던 기도가 오늘 나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다.

참되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기대하지도 듣지도 찾지도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숨 쉬지도 만족하지도 기뻐하지도 마음에 들어하지도 맙시다. 그분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기를.”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