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마음과 속이 쓰려 조반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방에 들어와 엎드려 기도를 하는데, 새벽예배 때 읽은 사무엘상 16-17장의 말씀이 계속 떠올랐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다윗 왕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 발로 울면서 도망을 쳤다. 설상가상 사울의 친척 시므이가 다윗 왕을 좇아오면서 저주하고 조롱을 퍼부었다. “영영 가거라!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돌까지 던지면서 계속 비방을 하였다. 한마디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다.
흔히 ‘저주’는 상대방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했거나, 억하심정이 겹겹이 쌓였을 때 퍼붓는 말이다. 좀 얄밉고 꼴사납게 보기 싫다고 저주까지 하지는 않는다. 저주는 그 사람이 죽도록 밉지만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경우에 하는 악담이다.
시므이는 왜 이토록 다윗 왕을 미워하며,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다니면서 저주를 퍼부었을까? 이는 사울의 집안이 쫄딱 망한 이유가 다윗 왕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하였으나, 이제는 주님께서 그 피 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삼상16:8). 사울 왕이 다윗을 눈의 가시로 보았던 것처럼, 이전부터 시므이도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 다윗이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므이는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다가 기회를 포착하였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옳거니 잘됐다. 꼴좋네.” 겁을 상실 한 채 다윗 왕에게 저주를 퍼붓고 티끌을 날렸다. 그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격분하여 다윗 왕에게 아뢰었다. “죽은 개가 왕을 저주하는데,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제가 당장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잘라 버리겠습니다.
아무리 도망가는 신세였지만, 마음만 먹으면 다윗 왕의 명령으로 단번에 시므이를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누가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느냐?”라고 할 뿐이었다.
오갈 데 없는 사람을 돌보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으로 도리어 욕과 비방이 날라 오고 슬금슬금 피하고 약을 올리면 누구나 서로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아침부터 나를 피하는 분이 계셔서 마음이 불편하던 참이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왜 그러세요? 다시 힘내서 함께 잘 해 봅시다.” 손을 붙잡고 여쭈어 보았는데 별 반응도 없고 그 다음날도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석연찮은 마음으로 돌아와 “주님, 저 분을 사랑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데도 불편함이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때 다윗 왕의 상황이 떠오르면서 순간 나의 교만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나는 욕먹어도 싸다. 저 분이 하는 말들 중에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마지못해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 자신이 그렇게 여겨졌다.
다윗 왕은 분명 예루살렘 성전에서 허둥지둥 쫓겨나올 때부터 시므이가 저주를 퍼붓는 그 순간조차도 자신의 지난날들의 죄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밧세바를 간음하고, 충직한 신하 우리아를 치열한 전쟁 선두로 밀어 넣어 살인을 저지른 일 등
“여호와께서 명하신 일”이라며 모든 것을 겸손히 받아들였던 다윗 왕. 겸손한 사람만이 자신의 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내려지는 처벌을 달게 여긴다. 다윗 왕은 시므이가 퍼붓는 저주를 달게 들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정도로 겸손한 분이셨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나도 그렇고 보통의 사람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좀처럼 인정하지를 않는다. 혹 인정한다 하더라도 저주나 비방을 받는 순간에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앙갚음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경은 죄악 된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라고 가르친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2:3).
다윗 왕이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도 참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겸손이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득죄하였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겸손. 미움을 받아도, 부당한 비난과 멸시를 받아도,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명한 일로 받아들이는 겸손. 자신의 삶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알았기에 다윗은 참으로 겸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겸손히 낮아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문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18: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이 앞잡이다(16:18). 결국 우리가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는 이유는 오만함과 교만 때문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를 않는다. 사람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틀을 깨뜨리기를 싫어한다. 자신의 구미에 맞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기 좋아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환경과 조건을 계속 찾는다.
참으로 나 자신을 보아도 그렇다. 고집불통 인간이다. 목회생활을 30여년 해왔건만 여전히 지독한 자아가 순간순간 굼틀대며 교만하다. 내가 이런데, 더구나 상대방을 단번에 확 바꾸려고 했던 것은 얼마나 교만한가. 그래서 하나님은 내 삶에서 시므이처럼, 가시 같은 이웃을 끊임없이 붙여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단단한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기 위해서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거나 두들겨 맞게도 하시고, 절체절명의 위기가운데로 몰아넣기도 하신다. 그래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도록 이끄신다.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울고불고 철저히 회개를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금 찾아오셔서 은혜를 베푸신다. 겸손히 낮아졌을 때, 비로소 은밀히 숨겨진 자신의 자아를 깊이 발견하게 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아가 깨어지면서 우리의 영혼은 점진적으로 정결해져간다. 이처럼 광야연단과정에서 수없이 주님과의 숨바꼭질과 같은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성화되어 간다.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우리로 하여금 광야 길을 걷게 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겸손히 낮아지게 하심이다
좁은 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하였다. 다른 형제가 내게 까칠하고 퉁명하더라도 마땅히 내가 받아야할 몫이다. 교만한 자아를 철저히 깨뜨리기 위해서는 맞고 또 두들겨 맞아야 한다. 내 가정이나 나라가 어려운 이유는 결국 나의 교만 때문이다. 마음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좇아 철저히 살지 않는 내 교만 때문이다. 가슴을 치며 재를 덮어쓰고 눈이 짓무르도록 통곡해야 한다. 이 교만한 죄인도 다윗 왕의 겸손을 닮게 해달라고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본다
“하나님 아버지, 천 번 만 번 매를 맞아도 비난과 손가락질을 당해도 쌉니다. 이 죄인이 교만하고 거만했습니다. 아직 제대로 여물지도 못한 죄인이 뭔가 된 것처럼 남을 가르치려 하고, 내 마음대로 상대방을 움직이려고 했습니다.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죄인 괴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연약한 자를 겸손과 사랑으로 섬기지 못한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기도할 때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창가에 밝은 햇살을 비추신다. 강퍅한 마음을 녹이시는 주님의 선하심을 날마다 찬양하며 겸손히 천국을 향해 나아가길 오늘도 소망해 본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