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왜 보여주셨습니까
 
새마을 운동 강사
1960-1970년대에 우리나라는 한창 새마을운동이 일어나던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새마을운동 본부에서 나에게 강의를 하라는 소식이 왔다. ‘바쁘 다고 핑계를 할까?’ 어떻든 나라 일이니, 한 번 나가 보기로 했다. 새마을을 지도하는 여성들만 몇 백 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개화기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근대화를 이끌었던 우리 선배들, 애국 부인들, 그들의 애타하던 학문의 열기 그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일으켜진 YWCA 운동 등 신여성의 이야기, 자녀 교육에 대한 이야기 등 하고 싶었던 여성 강연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계속 부르는 대로 시간만 되면 가기로 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신자든 아니든 사회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서 나는 사명감을 갖고 나아갔다. 실제로 사명감을 갖고 하는 사람을 택하기 어려운 모양이기에 대담하게 순종했다. 이것을 아는 우리 학교 어느 교수님이 나에게 “이런 일 해도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어느 당의 정치 강연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명감을 갖고 우리나라 여성 교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몇 년을 다녔다.
망원동 빈민선교
우리나라 70년대에는 급작스러운 산업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어김없이 찾아와 저소득층은 살길을 찾으려고 서울로 몰려들었다. 집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빈민들이 판자촌을 이루며 사는 망원동에 나는 태평스럽게 집을 새로 짓고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 개발되는 곳이라 울타리 밖으로 지나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어디서 오는 아이들인지 무척 가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줄을 지어 다녔다. ‘어디 있는 아이들일까?’ 하고 한 번 뒤따라 가보았다.
한강 쪽으로 7분쯤 갔는데 이상하게 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좀 더 강 쪽으로 가면서 보았더니 판자촌이 몇 천 세대인지 모르게 둑을 따라 즐비해 있었다. 한강 뚝 너머에는 강 쪽으로 다시 둑을 쌓고, 거기에 서울 시내 분뇨를 다 쏟아 부은 분뇨 못이 되어 있었다.
그 마을 사람의 이야기인데 무허가 판자촌은 공중에서 사진을 찍어가면서 새집이 생기거나 확장될 경우 벌금을 물게 되어 있어서 화장실이 없는 동네라고 했다. 몽둥이를 세우고 가마니로 막은 몇 곳은 있었지만, 도저히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가까이 있는 밭에서 용변을 본다고 했다. 파리는 새까맣게 온 마을에 가득했다.
이런 동네가 양화교에서 시작해서 지금의 성산대교를 지나 수색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혹시 무슨 보건 기관이나 복지기관 또는 교회 같은 곳은 없는지 살펴보았다. 그 흔한 간판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동네야말로 우리 문화에서 완전히 잊힌 고장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아야 할까? 나는 마음이 슬퍼서 지금의 성산대교 근방 둑에 서서 울어 버렸다.
“하나님! 왜 보여 주셨습니까? 사랑의 주님! 저를 이곳에 보내 주신 것은 이들을 도우라는 것 인줄 압니다.”
나는 다음날 학부 기독교교육과 3학년 강의실에 들어갔다. 강의 시간에 나는 망원동 뚝방 마을에 참혹한 사람들의 삶을 내가 본대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끝나고 나오는데 3-4명의 학생이 따라 나오면서 “우리가 좀 가볼 수 없겠습니까?” 했다.
우리는 그날로 찾아갔다. 그들 역시 눈시울을 적시면서 그냥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들의 요청으로 하루에 100원짜리 방을 얻었다. 그 동네 한복판에 창문은 비닐을 붙인 한 칸짜리 온돌방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저 함께 사는 사람으로 섬겨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자고 했다. 또한 서두르지 말라고 부탁했다.
학생들은 그 방에서 같이 먹고 자며 그들과 사귀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동네에 환자를 업고 병원에 가기도 하는 등 가정불화로 싸움이 나면 자기 시계를 잡히고 상처를 싸매주면서 동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남학생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제일 먼저 화장실을 짓기로 했다. 관청에서 못 짓게 할 것을 알고 밤마다 전기 불을 켜놓고 조금씩 지어 갔다. 땅을 길게 하고 시멘트로 화장실을 지었다. 문을 달고 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 다음은 더러운 개울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밤 공사로 다리를 놓아 주었다. 학생들은 대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밤마다 노동을 하고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학교까지 다녀야 했다. 그 팀의 단장인 이상양 학생은 폐결핵 환자였다. 그는 성품이 잔잔하고 부드러우며 사람들을 기쁨으로 섬겨 동네에서 ‘천사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집집마다 다니며 겸손히 인사하고 상담해 주고 병에 걸린 사람은 약을 사다주기도 하면서 친절히 사랑으로 섬겼다.
이상양 전도사에게 등록금을 하라고 돈을 주면 금방 이런 사람들 돕는데 다 써 버렸다. 학교에 갈 버스비가 없던 때도 많았다. 그는 분뇨 처리장에 드나드는 분뇨차 즉 성동구 차 기사에게 부드럽게 찾아가 대화하며 전도하면서 사귀었다. 그런 차는 주로 한강 뚝 위로 다니기 때문에 광나루까지 가는 차들이었다. 광나루쪽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등교하기도 했다. 이 전도사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곁에 앉자, 고약한 냄새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웬 냄새냐고 같은 반 학생들이 소동을 피우곤 했다.
한번은 나에게 “교수님! 버스 차장들이 하루에 몇 번이나 문을 여닫는지 아세요? 1,400번이에요.” 하고 이 전도사가 묻는 것이었다. 나는 알 리가 없었다. 이 전도사는 이런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하곤 했다.
한번은 “교수님 우리 마포구 구두닦이 청소년들이 한 100명 됩니다. 이 아이들은 구두 닦는 자리도 세를 냅니다. 자릿세만 내지 않아도 애들이 공부할 수 있습니다. 집이 있으면 합숙을 시키면서 자리를 하나 둘 살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이 아이들이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셋집은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100만원이면 될 텐데요.” 나는 턱이 없다는 듯이 웃어넘기고 말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부탁을 왜 노력해 보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나 후회스럽다. 그 요청이 그의 마지막 요청이었다.
1972년 여름부터 시작된 망원동 봉사가 얼마 안 되어 서울시에 큰 홍수의 난이 닥쳐왔다. 그 판자촌 근처에 있는 하수처리장의 수문이 고장 나서 열지 못한 채 망원동 일대는 바다처럼 모두 잠기게 되었다. 가난한 수천 세대는 남김없이 더러운 물에 잠겼다. 원래 이들은 대부분이 수재민으로 국가의 조치로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전도사는 긴급히 좀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에 연락해서 대피하도록 했다. 뗏목을 만들어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손수 실어 나르느라 밤낮을 잊어버렸다.
또한 관공서와 연락해서 수재민의 숙식을 해결해 주며 동민을 위로하며 섬겼다. 동민들은 이 전도사의 따뜻한 구호의 손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3-4일이 지나 수복하여 또 집으로 돌아왔지만 모든 것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