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의 인내

세상은 갈수록 빠르고 빨라진다. 느릿느릿 걷고 약삭빠르지 못하면 미련하게 생각한다. 빠르게 돈은 더 많이, 명예는 더 높게, 하지만 실제로 행복과는 더 멀 수도 있는데 말이다. 욕망은 더 속도를 내라고 채찍질 하지만 결국 정신없이 빠르게 가다보면 어느 순간 삶을 마감하는 게 인생이다.

“강물이 느리게 흐른다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뒤돌아보면 너무 느리다고 서툴다고 우리 마음의 등을 떠밀고, 이웃의 등을 떠밀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남들의 빠른 걸음에 조바심을 내다가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들들 볶기도 하였다. 남들의 빠른 성공에 배 아파하면서 이웃의 등에 질투, 비방, 분노의 화살을 수없이 꽂기도 하였다. 성급함과 조심성의 부족으로 인하여 이웃에게 상처와 수치감을 주기도 하고, 도태될까봐 근심과 두려움에 떨기도 하였다. 메마르고 황량한 광야 길을 걸으며 순간순간 영혼의 촉각을 세우고 느릿느릿 가는 게 너무 싫고 답답하여 몸부림을 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삶의 속도가 우리 영혼을 성숙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달팽이는 인내로 노아의 방주에 이르렀다.”는 스펄젼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을 알아가고 닮아가는 성숙의 여정에는 지름길이 따로 없고 꾸준함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단거리 경주자가 아닌 마라톤 경주자이다. 달팽이는 서툴고 느리지만 꾸준하고 성실하다.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다. 비록 느리지만 결코 뒤로 가지는 않는다.

달팽이의 머리에는 늘었다 줄었다 하는 뿔처럼 생긴 한 쌍의 촉각이 있는데, 이는 명암(明暗)을 판별하는 눈이다. 비록 느리더라도 달팽이처럼 영혼의 촉각을 세워서 순간순간 양심의 눈을 밝히고 빛과 어둠을 분별하며 살얼음 걷듯이 조심스럽게 광야 여정을 가야 하리라. 하지만 요즘 난 이를 참 불편해하고 있다.

집채만한 등짐을 진 달팽이의 고단하고 불편한 삶이 점점 싫어진다. 마음 고생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어쭙잖은 충동에 영성생활에 금이 가고 있다. 그냥 훌훌 벗어버리고 영적인 싸움도, 맡겨진 사역도 포기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약삭빠른 미꾸라지 한 마리가 마음을 이러 저리 휘젓고 다니며 흙탕물을 일으키고 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그냥 마음고생하지 말고 넓고 쉽고 편한 지름길로 가란 말이야. 그동안 많이 지쳤잖아. 조금만 쉬었다가 가도 괜찮아.’

“메마른 땅을 촉각을 세우고 느리게 가는 것은 당신만의 고통이 아니라오.” ‘달팽이의 삶’이라는 제목아래 쓴 어느 시인의 글귀처럼, 비단 영혼의 촉각을 세우고 느리게 가는 것은 나만의 고통이 아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결코 무지개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 이루어지는 듯하나 비바람을 맞으며 인내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결코 이 길은 편안과 정착이 아니다. 세상이 그리워 멈춰서는 안 된다. 낯설고 두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나가야 한다. 숨이 차게 힘들어도, 도망가고 싶은 숨 막히는 순간이 닥쳐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 광야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비바람이 무서워서 광야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고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달팽이처럼 또 정진하고 정진해야 한다.

얼마 전, 우리나라 최초로 사제가 되었던 최양업 사제의 일대기를 보며 부끄러워 눈시울이 붉어졌다. 소천할 때까지 약 12년간 매년 7000리(약 2천750km) 이상을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1860년에는 경신박해로 숨어 지내야만 했지만 이때도 밤마다 성도들을 찾아다녔다. “저의 관할 성도들은 깎아지른 듯이 높은 산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흘이나 나흘씩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해 기갈해하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단 한 시도 쉴 틈이 없었다. 홀로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며 손발이 갈라지고 입술이 부르트고 지치고 지쳐도 또 걷고 걸었다. 가시덤불에 찢기고 피로가 극도로 쌓여 걷기조차 힘들 때 기어서라도 기어이 험준한 산을 또 넘고 넘었다. 어떤 역경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지쳐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셨던 주님의 피 묻은 발걸음이 그의 발걸음을 언제나 강하게 이끌었다.

역병(장티푸스)으로 인해 모두가 도망간 그 자리를 홀로 지키며 과로로 쓰러질 때까지 환자들을 일일이 돌보던 그 손길, 초췌한 모습에 한걸음조차 떼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조금 쉬었다가 갈까요?”하는 물음에 손짓으로 어서 가라고 할 뿐이다. 가느다란 숨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마지막 순간의 고백 앞에 가슴이 시리고 아프다.

“내 사랑하는 조국에서 어질고 불쌍한 우리 조국의 백성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이제 절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전 지금처럼 쉼 없이 걸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천천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리라”라는 의미로 천천히 할 서(徐)와 자신의 모난 성격을 평평하게 해 달라고 평(平)을 넣어 이름을 새롭게 지었던 서서평 선교사(徐舒平, Elisabeth J. Shepping). 그녀의 기도문이 새삼 더 깊이 와 닿는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왜 이리 잠잠하지 못합니까? 제 때에 복음이 꽃피지 못하여도 무슨 일이든 서서히 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아버지 저는 또 왜 이리 못났는지요? 환자들을 돌보면서도 제 먹을 것 제 입을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의 모난 성품을 평평하게 해주세요.”

120년간 숱한 모욕과 비방과 멸시 속에서 방주를 지었던 인내의 노장 노아, 빠르게 높이 오를 수 있는 세계의 강국 이집트 왕자의 자리를 포기하고 미디안 광야에서 천하고 천한 목동으로 40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 모세,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에 불이라도 내려서 저들을 다 멸하라고 했던 제자들의 성급함과는 달리 험난하고 먼 길로 돌아가셨던 예수님.

우쭐거리며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자랑할 때가 아니다. 지금껏 달려 왔노라고 이리저리 기웃거릴 때가 아니다. 쉼 없이 목표를 향하여 정진했던 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때이다. 자만, 나타, 천박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말이 아닌 땀으로 두 발로 말해야 할 때이다. 엄살 그만 피우고 연단의 불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할 때이다. 더딘 것 같아도 영혼의 촉각을 세우며 철저한 회개의 삶으로 세상을 거슬러 돌아가야 할 때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더딘 것 같아도,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아무런 대가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냥 묵묵히 쉼 없이 끈기와 인내로 이 광야 길을 걸어서 구원의 방주 타고 저 천국에 다다르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