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하늘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먼지로 흐렸던 하늘이 세찬 바람으로 인해 벗어지고 평화의 색깔을 보일 때, 마음은 유쾌해지고 너그러워진다. 그때에는 구름의 모양이 문제되지 않는다. 펼쳐진 파란 하늘이 주는 즐거운 넉넉함이다. 맑은 물도 즐겁기는 매 한가지다. 봄의 신록도, 아기의 눈망울도, 꽃잎도, 숲의 이슬들도 다 맑고 깨끗하다. 이렇듯 맑음은 기쁨의 요소 중 다른 것과 비교를 거부할 만큼 절대적이다.

맑은 영혼을 만나는 일도 다른 어떤 것보다 감동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누가 어떻게 보고 뭐라 비난해도, 꿋꿋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소외된 작은 자들, 죄를 고백하는 자들을 찾아 위로하시고 치료하셨던 주님은 참 맑은 분이셨다. 부정한 여인의 참회와 감사의 눈물에 발을 맡기시고,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비난 앞에서도 병든 자를 일으키시고, 곧 스승을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닦이셨던 주님은 푸른 하늘보다 더 맑은 영혼이셨다.

예수님의 맑음을 닮기 소원하는 영혼들도 맑아진다. 자신의 죄와 허물로 인해 탄식하며, 작은 자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는 이의 영혼은 맑다. 불순한 이익이나 동기를 괴로워하고, 손해를 보아도 순수한 목적과 방향을 찾아가는 이들은 맑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을 받는다. 그 복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친히 뵙는 복이다.

이런 이들은 넘겨짚지 않는다. 속는다 할지라도 지금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늘이 먼지를 품고, 사랑이 불합리를 품는 까닭이다. 정죄나 비방이나 험담은 그 속에 담길 수 없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유치원 선생님이 화장실에 칫솔을 놓고 온 원아에게 “어떻게 하지? 칫솔이 혼자 외로워할 거야.” 하자 아이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뛰어가 “미안해, 혼자 있게 해서 미안해.” 칫솔을 쓰다듬으며 품에 안고 나왔다고 한다. 아이의 순진함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픔을 묵상하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셨어요, 저같이 아무 가치 없는 자를 어떻게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으셨어요?’ 눈물짓는 영혼은 더 맑다. 마음속의 작은 죄도, 불순한 동기도 몹시 괴로워하며 회개하는 영혼은 더 맑다. 먼지처럼 일어나는 이기심을 고백하고, 작은 자신의 교만과 아집 때문에 주님을 부르며 가슴을 치는 영혼은 더더욱 맑다.

문제는 합리화하고 상황 핑계를 대고, 진리를 아전인수식으로 적용하는 것에 있다. 고라와 그 일당이 자신을 아론이라 생각한다면, 징계를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얼마나 끔찍한 불행인가! 그런 영혼은 무섭다. 한없이 가엾다. 교오함으로 눈이 멀고 지혜를 잃어가는 까닭이다.

맑음은 누룩을 허용하지 않는다. 타협도 선한 명분도 거부한다. 맑음은 그냥 잘못은 고백하고, 사과할 것은 진심으로 사과하며, 뉘우치는 자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다. 벼르거나 보복하려는 마음이 어찌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랴.

하나님은 맑은 영혼들을 찾으신다. 정결을 사모하며 회개하는 이를 찾아 사용하신다. 주님이 깨끗케 하신 맑은 영혼들이 흰 구름처럼 사는 맑은 천국이 그립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