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고통

예수님은 끊임없이 수난을 겪으십니다. 골고다로 가시는 길에서 넘어지셨듯이 굶주린 채 계속 넘어지십니다. 우리는 서슴없이 일어나 그분을 돕고 있습니까? 그분이 나약함을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 밥 한 그릇을 들고서 그분의 곁에서 함께 걷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그분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해달라고 청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그 순간이 바로 고통을 함께 나누신 예수님의 고통을 나눌 순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얼마 전 내가 뉴욕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에이즈 환자를 위한 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나를 부르더군요. 내가 그 침상으로 다가가자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녀님은 제 친구지요. 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습니다. 저는 견디기 힘든 두통을 느낄 때는(에이즈를 앓는 사람은 엄청난 두통을 느낍니다) 그 두통을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고통과 함께 나눕니다. 그 고통이 등으로 옮아가면 병사들에게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아픔을 나눕니다. 손이 아플 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눕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랑의 증거입니다. 에이즈라는 채찍질을 당하는 한 젊은이가 보여 주는 사랑의 증거인 것입니다. 치료될 가망이 거의 없고 살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젊은이의 얼굴에서 슬픔이나 고뇌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대한 평화와 심오한 기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나누고 예수님에 대한 우리 사랑을 보여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어떤 잡지에서 나를 보고 ‘살아 있는 성인’이라고 했다는 군요. 누군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나는 모든 사람, 특히 고통 받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나는 우리 수녀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에는 절대 침울한 표정을 짓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언젠가 한 수녀님이 침울한 표정으로 발을 무겁게 끌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수녀님을 사무실로 불러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 앞에 서거나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십자가는 아름다운 방에서가 아니라 골고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가면서 행복을 느껴야 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분의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함께 나눌 때 고통은 진정한 의미를 지니게 되고, 우리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됩니다.

마더 데레사의 『말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