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회복을 명하소서


내 아들은 유도를 배우고 있다

이태 동안 넘어지는 것만 배웠다고 했다

낙법만 배웠다고 했다 넘어지는 것을 배웠다니

네가 넘어지는 것을 배우는 이태 동안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살았다

한 번 넘어지면 그뿐 일어설 수 없다고

세상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잠들어도 눕지 못 했다 나는 서서 자는 말

아들아 아들아 부끄럽구나

흐르는 물은 벼랑에서도 뛰어 내린다

밤마다 꿈을 꾸지만 애비는 서서 자는 말

서서 자는 말, 정진규


서서 자는 아버지들

서서 자는 말의 화자(話者)인 아버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서서 잠을 잔다. 유도를 배우는 아들이 낙법 즉 넘어지는 법을 이태나 배웠다는 말을 듣고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서서 자는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한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꿈은 꾸지만 서서 자야 하는 아버지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삶을 살고 있다. 한번 넘어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잠들어도 눕지 못하는 몸과 마음, 다리 한번 쭉 뻗어보지 못한 삶이 고단하게 이어지고 있다. 알면서 어쩔 수 없다며 서서 자는 아버지들이 늘어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가 오는 2020년경, ‘우울증이 모든 연령에서 나타나는 질환 중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다. 우울증이 2020미래 질병 1로 등극한다면 암과 같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한 사망보다 우울증에 의한 사망이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전한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은 상실과 스트레스다. 이제는 전 인구의 약 15퍼센트가 한 번 이상 경험할 정도로 흔한 질병이며, 환자의 10퍼센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심각한 질병이 되었다. 정신과를 찾는 사람 중 4명 중 1명은 우울증 때문이고, 최근 4년 사이에 47.7퍼센트나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전부 다 서서 자는 아버지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죄의 짐을 지고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서서 자고 있기 때문이다. 붙잡고 있는 아집적인 신념, 주님 뜻을 행한다고 하는 독선의 탈, 허례와 위선으로 가득한 그럴 듯한 삶, 이웃과 경쟁하고 은근히 나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넘어질까, 넘어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까봐 꽉 잡고 힘을 주는 아버지와 닮았다.

습관처럼 이어져온 길, 타성에 젖어 형식만 가득한 모습들을 붙잡고 있는 손과 다리는 고단하고 지쳐있다. 한손만 놓으면 스르르 풀리면서 주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타인의 시선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더 힘을 준다. 그러다 몸이 아프기 시작 한다. 병이 난다. 영적인 힘은 없고 빛의 열매들이 없으니 마음이 우울해진다.

아집과 독선과 교만, 음란과 태만, 거짓과 포학 질투가 삶의 자리를 갉아먹고 영적으로 진보하는 길을 가로막는데, 치료할 생각보단 내 생각과 사고에 머물러 있다. 누군가와 경쟁하며 서서 자느라 지친 우리들,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낫기를 원하느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만나신 예수님은 그를 고쳐주기 전에 질문을 하신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치유와 회복은, 내가 병을 앓고 있는지 인식하여 치료받길 원하는 자들의 간절함 위에 이루어진다.

복음서에는 기록된 수많은 치료와 회복의 역사를 볼 때, 그 중심의 소원은 언제나 간절함에서 비롯되었다. 고침 받는 일에 절실하지 않은 이들은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실함으로 예수님을 불렀고 병을 고침 받았고 회복을 이루었다. 주님은 간절한 이들의 소원을 믿음 위에 세웠고 그 후에 치유와 회복을 나타내셨다. 낫기를 원한다면 간절함을 가지라는 것이 주님의 조건이었다.

우리 모두는 낫고 싶어 한다. 회복되고 싶고 새롭게 변화되고 싶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절실함이 충족되지 않아 치유와 회복을 이루지 못한다. 너무 오래된 병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또 한해를 이어나간다. 그럴듯한 명분만 덧입혀진 채.

작은 생채기도 크게 억울해 하면서 나의 아픈 상처를 보시라고 주님께 화를 내기 일쑤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더 잘 아실 텐데, 뭐가 그리 억울한지 우리는 참 주님을 답답하게 한다. 그러면서 낫고자 하는 절실함을 팽개치고 말을 뱉어내기 바쁘다. 말이 너무 많다.

아프다고 엄살을 부린다. 연약한 우리들의 감성과 지성, 의지는 주님이 아니면 안 되는 불완전함으로 목말라 있는데, 나는 그럭저럭 잘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을 혼내주세요, 그 사람이 잘되는 것이 싫어요. 제 말이 다 옳아요. 저는 이제 웬만큼 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그동안 주님 일에 얼마나 헌신을 해 왔는지 아시죠? 그러니까 저한테 잘하셔야 해요. 제가 없으면 주님일 안돼요. 저는 이제 좀 컸다고요.’

주님은 이런 우리들에게도 작년에 이어 금년에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또 질문해 주신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크리스티안 노스럽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병은 적이 아니다. 병은 그냥 메시지이다.”

자꾸 몸이 아프고 어딘가 불편하다면 우리는 아픈 것이다. 주님의 메시지다. 치료받으라고 하시는 사랑의 언어다. 이웃이 불편하고, 가정이 불화하고, 교회에 불충하고, 기도가 안 된다면, 그것은 신호다.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고, 주님일인 것 같으나 나를 위해 바쁜 일을 하고 있다면, 내가 잘하는 것 같고, 그래서 환경과 사람이 불편함으로 다가온다면 그것 역시 메시지다. 낫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을 세워야 할 때다.


상처투성이 그리스도를 보라

아빌라의 테레사는 스페인 출신의 영성가다. 교회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여성 신비가 중 한 명이다. 그녀가 영성활동을 하면서 평생 어려움을 겪었던 것 중 하나는 사도바울의 가시처럼 육체적인 질병으로 평생 고통을 받은 것이었다. “둥글게 말아놓은 실 뭉치.” 같이 침대에 누워서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극심한 통증에서도 살 정도였다. 그런데 테레사에게 병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통로였다. 병에 시달리는 육체를 돌보느라 시간을 많이 써야 할 때, 기도를 하고 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시간을 두어야 할 때, 스스로 육체의 노예가 된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할 때, 테레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과 솔직하게 나누었다.

모든 약함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고 다시 털고 일어섰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을 홀로 두지 않으셨고, 부드럽게 대해주셨다고 그녀는 말한다. 아픔과 고통을 통해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에 눈을 뜨고는 내 소원, 님을 뵈옵는 것이요, 내 두려움, 그를 잃을까 함이요, 내 고통, 그를 못 누림이요, 내 기쁨, 그리로 갈 수 있음이어야 하나니, 이제야 나는 크나큰 평화와 더불어 살리라고 노래한다.

아프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고통스럽고 싶고, 스트레스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모든 이들은 고침 받고 회복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상처 난 얼굴을 보라. 그 아픔을 보면서 나의 괴로움과 아픔이 얼마나 작고 초라하며 한낱 자존심을 세우는 일인지 직시해야 한다. 인정하고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주님께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의 채찍은 우리에게 나음을 주셨고, 찔림은 허물을 용서해 주셨으며, 상함으로 죄악을 용서해 주셨다. 그 귀한 사랑의 공로가 우리를 살게 하시고 회복케 하시려고 오늘도 준비된 은총으로 기다리신다. 일의 실패와 이웃사랑의 부족,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연약함, 더 충성하지 못하는 게으름, 기도하지 못하는 입술, 찬양하며 감사하지 못하는 불평의 언어들, 중상모함과 당 짓기, 이기주의와 허례, 위선들. 끝이 없는 질병들로 인해 서서 자면서 불안해하지 말고 주님께 말씀드리며 치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평생 할 일이다. 상처 난 예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질문해 주시는 부드럽고 따뜻한 물음에 간절함으로 응답하면 된다. ‘,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전부시고 나머지는 무()일 뿐이다. 간절함으로 상처투성이 주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치유와 회복은 시작된다. 낫고자 하는 이여! 목숨 바쳐 회복과 치유의 길을 열어 놓으신 상처투성이 예수님의 얼굴을 절실함으로 바라보라.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