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느니라

구스의 세라 군사 100만 장병을 통쾌하게 전멸시킨 유다 아사 왕의 승전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소서!(대하14:11)라는 절규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고삐를 늦추지 않고 선지자 아사랴는 “우상을 파괴하소서! 하나님의 제단을 견고히 하소서!”라고 당부하며 행위에는 상급이 따른다(대하15:7)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행동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삼상2:3)의 저울추는 정밀하여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는”(고후9:6) 수확의 법칙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라 하신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20:12) 재판정에 출두할 채비를 했느냐고 다그쳐 물으신다. 후한 상을 준비해 놓으셨다고 받으라 하신다.

기독교는 기복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성경 구절구절에 상 주시겠다는 포근한 말씀으로 가득 채워졌다.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상으로부터 주를 위한 땀과 박해까지 흡족히 상 내려주시는 정 많은 주님이시다. 선물로 받은 하루는 천국 상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고 내가 감당할 일감은 천국 창고에 보화를 챙기는 재료들이다.

진정한 보상은 세상에는 없다. 가짜 상만 많을 뿐이다. 수고의 대가로는 너무나 볼품없는 것들이다.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으며”(40:10),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5:12) 하시며 하나님이 직접 하사해주시는 그 표창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자.

물론 물량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공로주의에 중독되어도 안 된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6:3) 겸손을 놓쳐서도 안 된다. 그러나 더 많은 씨앗을 뿌림은 그만큼의 면류관과 바뀐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한”(고후11:23) 사도 바울의 상은 얼마나 엄청날까?

그렇기에 그는 대담한 어조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8)라고 했다. 죽음의 문턱에 올라선 그의 표정은 오히려 시상대에 올라서는 앳된 소년의 흥분이다. 벅찬 기쁨을 이기지 못해 춤추는 것만 같다. 참으로 부럽고 또 부럽기만 하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12:2,3).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