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일기


그렇게도 맑은 샘은 없기에 티 없이 맑고 빛나는 나는 안다네.

그곳에서만 빛이 나온다는 것을 밤이라 하더라도

-십자가의 성 요한 어록에서

어둔 밤

십자가의 요한이라는 분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분이다. 그는 이름 앞에 ‘십자가의’라는 수식의 말을 붙여야 할 만큼 자신의 생활에서 거룩함을 향해 영웅적인 노력을 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만약 누구든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통과하면서 어둔 밤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영혼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위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죽음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파스카의 신비는 개혁자로서, 신비 시인으로서, 사제 신학자로서의 그의 삶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1567년, 25세에 갈멜 신부로 서품된 요한은 고통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들어간다. 지나친 자기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신앙의 절개는 점점 심해지는 반대와 오해, 박해를 당하게 했고 결국 감금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서 어둡고 축축하고 비좁은 감방에서 오직 하나님 하고만 몇 달씩 앉아 있으면서 십자가를 뼈저리게 깨닫기에 이른다. 죽음과도 같은 감옥에서 요한은 영혼의 시를 읊으면서 생명으로 나아갔다.

하나님과의 신비한 일치에 따르는 황홀 상태를 표현하는 신비 시인으로서 유일한 존재가 되었다. 한 사람의 인간이며 그리스도인이었고 갈멜이라는 영성 단체의 일원으로써 자기 자신 안에서 깊이 있는 승화를 몸소 체험해 나간다. 그가 영적 지도자로서 우뚝 설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규율과 자아의 포기, 정화를 강조하는 데 있었다.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좁은 길을 외치며 먼저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야 했고, 고통을 온유하고 겸손하게 승화시켜야만 했다.

단호하고도 힘 있게 복음의 모순을 강조하면서 그 모순의 끝에서 발견해 낸 결과물은 어둔 밤이었다. 그 깜깜한 고통이 하나님과의 일치를 이루게 했고 그 답답한 환경이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한 사람이 되게 함을 알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둔 밤에 그는 하나님 한분만 소유하는 보석을 캐냈고 그 어둠이 결국 환하게 빛나는 십자가는 부활로 인도하고, 고통은 황홀로, 어둠은 빛으로, 포기는 소유로, 자기부정은 하나님과의 일치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았다.

“너희가 만약 너희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다면 너희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십자가’의 사람이 전해준 짧지만 충만한 49년의 삶은 세상에, 거룩한 역설을 알게 해주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자리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빛나는 법이다. 별 헤는 밤이라는 시를 썼던 윤동주는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의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배경에서 조국의 현실을 괴로워했고, 개인으로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에게 느끼는 ‘부끄러움’을 시로 표현하곤 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글을 간신히 쓸 수 있었던 상황. 그는 그 절박한 고통스러움에서 지나가는 계절을 앞서 보았다. 가혹하리만치 아픈 현실에서 그래도 지나가는 계절이 있음을 말이다. 길고 지루했던 시간이 지나가면 그것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그 추억은 트라우마(trauma)가 되어 나를 짓누르는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에 때가 있고 주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 우리를 숨 쉬게 한다. 영원히 지속되어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시간은 지옥뿐이다. 그 자리에 있지 않기 위하여 어쩌면 우리는, 몇 만 몇 억분의 일의 고통에 해당하는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스치는 고통에도 이제 죽었구나 엄살을 부리는 것이 우리 광야 여정을 가는 이들의 심신이지만, 하나님은 절묘하게도 그 순간을 살짝 지나가게 하신다. 그 찰나의 순간에 얼굴이 고통에 살짝 데이고 때론 화상을 입어도 잠잠히 바라만 보시는 순간 말이다. 왜 이렇게 나를 아프게 하냐고 소리를 치려고 하면 우린 이미 그늘에서 쉼을 하고 있다. 고통의 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엄살을 부리는 나의 목소리를 내가 들으면서 스스로를 더 힘들게 하게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 아파요. 하는 동안 하나님은 나를 훌쩍 들어서 다음의 자리로 이동시켜 주시는데 그 순간을 참지 못해 울어 버리고 만다.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았던 광야여정을 걷고 또 걸으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속울음을 많이도 울었을 것 같다.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포악하고 여전히 음란하고 여전히 원망하고 미워한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도 가을로 가득한 계절을 미리 보며 희망을 품고 싶은데 여름의 강렬한 햇빛은 지친 발걸음에 비웃음처럼 내리 쬔다.

여기서 그만 절망하라, 그만 포기하라, 너도 같이 화를 내어라.

가슴을 헤치고 속에 담긴 진실을 보여 줄 수도 없고, 같이 화를 내며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으실 것이다. 아, 주님! 숨을 쉴 때마다 깊은 한숨이 된다.

에벤에셀의 주여

데레사라는 성녀는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연인관계로 설정했다. 그분과 비밀스럽게 주고받은 연서(戀書)가 바로 ‘천주자비의 글’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소품집’(분도출판사) 마지막 글에는 ‘나는 언젠가는 없어져 버리고 말 모든 피조물, 온갖 재보를 가지기보다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바라면서 살고 또 죽고 싶다.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 제 희망이 당신 안에서 좌절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요. 제가 늘 당신을 섬기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저에게 행하십시오!’라는 구구절절한 사랑의 고백이 나온다.

십자가의 요한도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도 어둡고 고통스러운 조국의 미래를 바라보며 울던 윤동주 시인에게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셨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도움의 돌이 되시는 그분이 그들의 곁을 지키셨고 울분과 고통의 밑바닥에서부터 항변하고 변명하고 대항하고 싶은 분노에, 육신의 세력에 거룩한 도움의 돌로 중심을 잡아 주셔서 어두운 밤 하늘에서 이미 들어찬 풍성한 가을을 보게 해 주셨다.

성 프랜시스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대상은 나병환자들이었고 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던 시절이 있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경외가 마음속에서 일어나 예전에는 쓰다고 느껴졌던 것이 영혼과 몸의 단맛으로 변하게 되었을 때 그는 그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네가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네가 육신 안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던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이 너의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했을 때 지금 너에게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던 모든 것이 씁쓸하고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피하던 것들 그 자체가 크나큰 감미로움과 넘치는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가 받아들인 두려움과 고통은 가장 큰 위로요 기쁨이며 이미 풍성한 가을 들녘으로 다가온다.

아무리 깊은 밤이어도 그곳에서 맑은 샘물이 흘러나온다. 계절이 지나가는 자리는 이미 가을로 가득 차 있다. 여름이 가고 있다. 너무 아파서 살갗이 데이고 쓰리고 고통스럽던 여름이.

이미 가을로 가득 찬 여름의 끝자락이다. 아프고 지친 나의 걸음에 눈물 한 방울 더 뿌려 주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붙잡고.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