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이번 추석은 지금까지 보냈던 그 어떤 명절보다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처음으로 큰댁이 아닌 기도원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 속하지 않고 은혜의 자리로 간다는 것이 꿈만 같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장소를 찾아 가기까지는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초행길이기에 어렵기도 했지만 어마어마한 폭우로 운전하는 것이 힘들었고, 바로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불안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가던 중 마음이 바뀌어 가기로 했던 장소를 바꿔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라디오 스피커에서 우리가 가려했던 모든 길이 통제가 되어 진입이 안 된다고 하는 전파가 흘러나왔습니다. 주님께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마음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신 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도착한 기도원이 개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 은혜 받기위해 찾으시는 분도 많지 않아 한적하고 조용했습니다. 첫날 저녁집회에 참석했을 때도 얼마나 많은 비가 오던지 끝나고 나서 너무나 궁금해 휴대폰 DMB로 뉴스를 보니 많은 곳이 수해로 난리가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 강사 목사님께서 설교 중에 성령님에 대한 말씀을 주시는데 성경에서 성령을 묘사하는 여러 가지의 표현 중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 비둘기의 특징과 성령 받은 자에 대해 말씀을 주시는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둘기는 일 년에 여러 번 알을 낳는데 많이 낳지 않고 대략 두 마리 정도 낳는다고 합니다.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자라면 비둘기가 새끼를 번식하는 것처럼 영적인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명령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말씀하신 것처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모습을 보니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하던지요. 영적인 자녀를 낳아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말입니다. 그리고 비둘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절대로 짝을 바꾸는 일이 없답니다. 비둘기가 구구하고 우는 것이 바로 짝을 찾고, 사모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그처럼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바라보고, 환경 바라보고, 육신의 것 채워가며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가는 것이 성령 충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일 년에 한번 털갈이를 한다고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적으로 점점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점점 세상의 때를 벗고, 영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또한 비둘기는 먼 곳에서도 자기 둥지로 돌아오는 귀소성이 잘 발달된 새입니다. 성령을 받고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라면 자신의 영적 둥지를 이곳저곳 옮겨 다니지 않고, 자신의 둥지인 교회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둘기의 먹이는 곡식낱알 등 주로 식물성 먹이를 먹습니다. 성도들은 늘 누룩이 없는 빛 된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은사가 많고, 봉사와 헌신으로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해도 생활 구석구석에 밝은 빛이 없으면 어둠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빛 된 양식을 많이 쌓아 순간순간 누룩을 썩지 않고 선악을 잘 분별하여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하는 새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심령의 평화로 가득 차게 됩니다. 참 평화와 평안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불안과 초조는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불안과 초조를 거두고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평화는 광야연단과정을 다 마친 후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졌을 때 비로소 임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영속에 좌정하시어 죄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마음과 행실을 닦는 일에 열심을 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