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과 성경 핵심진리 12회

7. 라오디게아 사자에게 보낸 편지(3:14-22)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160km에 위치한 라이커스 계곡에 있으며, 금융산업으로 부유했고 교통의 요충지역이다. 그리고 모직물과 ‘부루기아 가루’로 만든 안약과 의학교가 있으며, 이곳은 물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 교회는 에바브라가 설립을 하였다.(골 4:12,13) 주후 4세기에 교회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하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교회인 것 같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13절) ‘아멘’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칭호를 나타낸다.(사 65: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구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충성하여 참된 증인이 되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말해 주신다. 주님께서 이 칭호를 여기 사용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목회자의 신실하지 못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이다’ 이 칭호는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신 ‘알파와 오메가’에 해당되는 것으로 창조자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심과 그의 선재성을 나타낸다.(요 1:1-3; 히 1:2)
   2) 라오디게아 목회자에게는 칭찬이 없이 책망만 있다.  그를 향한 책망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절) 하셨다. 여기 그의 미지근한 신앙상태 곧 회색적인 믿음을 책망한 것이다. 만약 계속 ‘미지근한 신앙’일 때에는 주님께서 ‘토하여 내겠다.’ 하셨다.(16절)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볼리로부터 온천수가 그리고 골로세로부터 찬물이 흘러 들어와 라오디게아에서 합쳐서 미지근한 물이 된다. 유황이 섞인 이물은 마시기 좋지 않아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 이처럼 영적으로 미지근할 때 버려 버리겠다는 것이다.
  신앙에는 회색이 없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6:14-16) 하셨다. 엘리야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겼다. 이에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거리고 있겠느냐”(왕상 18:21) 책망을 했다.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여기 단테의 신곡의 한 중의 글을 소개한다.
   이 가엾은 모습을 이어가는 것은/ 평생 부끄러움도 사랑할 것도 없이/ 그런대로 적당히 지내온/ 애처로운 영혼들이었나이다./ 하나님께 항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충성하지도 못하면서/ 다만 저 스스로를 위하는 천사들의/ 저 나쁜 무리들 속에 섞여 이끌려 살고 있었구나// 하늘이여 어찌 저들을 쫓아내지 않으랴./ 하늘은 결코 더러워질 수 없는 곳// 저를 받아들이기 주저하니/ 이 죄인들이 저들을 인해 어느 영광을 가질까 함이라.//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글인가! 우리는 분명히 결단을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겠는가? 아니면 세상을 따르겠는가? 그저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여 살아가는 회색지대의 신앙은 안된다. 이것은 영적음행이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절)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목회자의 영적상태를 말씀해 주시고 있다. 이 목회자는 스스로 부족함이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그는 교인의 수가 많았고, 보수도 많았으며, 핍박도 비교적 적었으며, 기타 좋은 환경 가운데서 목회에 성공한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으로 그곳의 금융 산업으로 부유함과는 달리 영적상태는 죄에 메여 곤고한 자이며(롬 7:24), 가련하고, 가난하였다. 그리고 특수한 안약을 제조함과 좋은 의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함에도 등불이 꺼져가는 것처럼 그의 양심의 눈은 멀어 영적 장님이 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그는 당시 그곳에서는 최고급의 모피로 만든 검은 외투를 만들어 팔고 있지만 영적으로 ‘벌거벗고’ 있다. 이는 죄성과 정욕에 젖어 있는 추한 모습이다.
   많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목적은 예수를 믿어 천국가고 땅에서 복을 받아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정말 금상천하의 이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을 들어보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외적인 땅의 것은 모두 썩어지고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양자 중에 하나를 선택을 하여야 한다. 육신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영의 것을 추구할 것인가? 이 말씀을 통해 진정 우리가 먼저 추구할 것은 내적인 것 영적인 것이다.(마6:33) 육적인 은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덤으로 주시는 것이다. 십자가 요한은 이 육적인 축복을 가리켜 ‘하나님의 푸대접’이라고 했다.
  3) 예수님의 권면은 세 가지이다. 첫째 권면은 ‘불로 연단한 금’이다.(18a)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의 연단을 받아 영적으로 부요케 되기를 권하신다. 특히 기억할 것은 ‘내게서‘이다. 곧 성도들이 연단 받는 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둘째 권면은 ’흰옷을 사서 입어’이다.(18b) 앞서 사데 교회의 목회자에게 하신 말씀처럼 영적 할례, 성결의 은총을 받을 것을 권면하며, 마지막으로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셨다.(18c) 여기 안약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은총으로  어두워진 양심을 마치 성소에 등대의 빛을 비추듯이 말씀으로 비추어서 선과 악을 그리고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면서 살 것을 권면하신 것이다.(골 1:27; 2:3)
   20절에서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하시어서 그 가운데서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곧 징계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의 큰 은총임을 알 수 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20절) 교회에서 이 말씀을 잘못 인용하여 불신자들을 영접시킬 때 많이 사용한다. 여기 라오디게아 사자는 이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지금 쓰임을 받고 있는 목회자이시다. 초신자가 아니다. 이 말씀은 이미 믿는 성도님 마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이다. 이 때 성도가 영의 문을 열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지성소인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합일하시어서 함께 생활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케 하며 성령의 열매 삶을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 ‘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신 말씀에서 이 사실을 나타내시고 있다.
   4. 이긴자에서 주시는 축복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시겠다’ 하셨다.(21절) 이 보좌는 왕권을 받은 성도들의 좌석이다.  
주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