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큐티 본문은 시편 35:11-16 이다.

특히 13절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 나는 저희가 병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며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

다윗은  13절에 보면 자기 주변의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 긍휼과 구원을
기도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이 자기의 어려움이 되어 있고
자기가 기도 드렸던 사람들이 자기의 대적이 되어 있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

다윗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다윗을 더 더욱 조롱하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한 다윗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그러니 교회가 생각난다.(항상 묵상의 결론은 교회로 가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자주).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이 공존하는 곳이다.
교회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부활의 영광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 교회의 모습 가운데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나는 항상 부활의 영광에만 나의 시선이 가 있고 기대하며 기다렸지
그전에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십자가의 죽음은 보고도 외면하며
거부해 오고 있는 것 같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과정의 통과 없이는 절대로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부활의 영광만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나는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오고 강함은 연약함에서 오는 것인데,
그것이 십자가의 비밀이요, 능력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 가운데 있는데도 말이다.
(엡 3:16-19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머리로는 깨달아도 몸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행하는 믿음을 가졌을 지라도 지금은 침체된 믿음, 잠자고 있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게는 아직도 부활의 영광보다도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