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지는 숲길을 걷고 호젓한 들판을 거닐다 추수에서 제외된 못난 것들을 볼 때, 갑자기 스스로 작게 느껴졌을 때, 주님이 ‘거기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던 갈릴리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의에 대한 실패로 비참해질 때, 그분이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주는지, 살수록 더욱 크게 느껴간다. 작고 보잘것없는 천민의 마을이었던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희생은 모든 죄악과 허물이 다 모인 골고다의 그 저주스러운 형틀에서야 끝났다.

주님이 생전에 찾으셨던 곳도 그와 같았다. 버림당한 곳으로, 버림당한 사람들을 찾아가셨다. 외아들마저 잃어 앞날이 캄캄했던 나인성 과부에게,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며 공허하게 살던 수가성 여인에게, 평생 장님으로 살며 빌어먹던 바디매오에게, 천형의 나환자에게, 귀머거리, 벙어리로 죽지 못해 살던 이들에게 나아가셨다. 가엾은 작은 자들에게. 형편 좋은 자들에겐 모두 귀찮고 짐만 되는 존재들이요, 사회악이었다.

하지만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신 대로 그 가엾은 이들의 친구가 되셨다. 주님 주위엔 의인과 상류인들이 아닌, 죄인과 하류민들이 늘 함께했다. 그리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 하셨다.

사관에서 거부돼 마구간 구유에서 나시고, 불쌍한 자들과 함께 사시다, 두 강도 사이에서 죽어가셨던 주님은 진짜 구세주셨다. 그분의 의는 작은 자만이 아닌, 세상의 모든 작은 것들에게까지 미친다. 이름 모를 작은 풀꽃, 작은 벌레, 작디작은 미물들…. 그것들이 그럴듯한 아무 도움 없이도 생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장차 주님이 오셔서 이루는 메시아 왕국에는 참고 살던 모든 작은 것들이 위로받으리라. 작은 것들을 사랑하셨던 주님이 보좌에 앉으시는 것을 온몸으로 환영하리라.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으며 주님의 긍휼만을 갈망하던 모든 것들은 다 고개를 들리라.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침묵하며, 주님 때문에 당하던 작은 자들은 다 일어서리라.

그러니 자랑스럽던 것이 무너지고 초라해질 때 슬퍼하지 말자. 나이 먹고 쇠약해져 소외감과 함께 이곳저곳이 아파갈 때 괴로워 말자. 내면에 잡히는 자아로 인해 처참해질 때 절망하지 말자. 그 초라함과 괴롬과 비참함이 높아진 것들을 낮추고 크게 여긴 것을 작게 만드는 것들이라면 주님의 긍휼하심이 부어지리라.

늦가을에 애써 달린 못난 작은 열매가 엄마 등에 매달린 아가처럼 사랑스럽다. 아무도 줍지 않고 밟힌 작은 밤톨이 깜박거리는 별처럼 사랑스럽다. 뒤늦게 핀 철모르는 작은 꽃이 천진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아름답다. 

27살 젊디젊은 나이에 죽어간 윤동주 시인은 그래서 노래했을까.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였다. 밤마다 별을 헤는 마음으로, 세상의 이욕과 모순을 넘어 그렇게 참 자유를 향해 고고하게 살다 간, 주의 청년이었다. 작은 삶이 빛난다. 작은 것이 하늘의 빛을 받는다. 작은 마음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