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위해 십자가에서 깨뜨리신 사랑, 오늘도 그 사랑 안에 나 거합니다. 주님의 생명 내 안에 있고 주님의 사랑 날 강권하니, 나 오늘도 주께 내 삶을 깨뜨립니다. 주 머리 위에 붓습니다. 주님께 라면 아깝지 않습니다.” 

청소년 예배 때 “내 삶을 깨뜨립니다.”라는 찬양을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 멜로디도 아름답고 가사도 은혜로워 선곡한 곡이었다. 그런데 찬양을 다 부른 후 한 여학생이 뜻밖에도 “너무 무서워요.”라는 말을 했다. 어떤 부분이 그러냐고 하자 ‘나 오늘도 주께 내 삶을 깨뜨립니다’라는 가사가 무섭게 느껴진다고 했다. 

언젠가 “내가 예수를 못 박았습니다.”라는 찬양을 부를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역동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춘기 학생들에게 내 삶을 깨뜨리고 못을 박는다는 가사가 다소 무섭게 다가올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십분 공감되었다. 찬양은 입술로 흥얼거리지만 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삶 속에서 깨어지는 아픔이 그리 달갑지만 않다. 

며칠이 지난 목요일이었다. 화분에 물을 주며 주변을 정리하는데, 한 자매님이 라일락 나무가 죽어가고 있다며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낮은 담벼락과 수도꼭지 옆에 서 있는 아담한 나무였다. 봄이면 보랏빛 꽃을 피우며 향기도 그윽해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해주었는데, 나뭇잎 끝이 검게 말라가고 나무에 생기가 없었다. 나무 밑동을 감싸고 있는 시멘트를 깨어서 숨을 쉬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감사하게도 한 자매님의 수고로 시멘트 덩어리가 말끔하게 깨어져 나갔다. 그런데 정 해머와 망치로 주변을 더 많이 깨뜨려야만 살아날 것 같다며, 범위를 넓혔다. 수돗가에서 손을 씻으며 깨진 시멘트 조각들을 보니, 내 삶의 모습들이 하나둘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그동안 옛사람(겉 사람, 자기, 육신, 자아), 나(我)를 철저히 깨뜨린다고 하면서도 깨작깨작 시늉만 냈었다. 나 자신을 깨뜨려 나가는 게 때로는 버겁고 무서웠다. 어떤 한 부분을 깨뜨리고 나면, 더 큰 십자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상대방이 내 연약한 부분을 건드리면 기분이 상해 자아 하나를 깨뜨리는데도 한참 부대꼈다. 내 소유를 아낌없이 부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내 삶을 드리는 데도 주저했다. 때로는 오랜 시간 속에서 지친 마음에 자아를 깨뜨리는 일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겉 사람을 귀히 여기며 자존심을 앞세우다가 나를 으스러뜨리는 작업은 정작 뒷전이었다. 게다가 일에 분주한 나머지 향유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린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 발 앞에 조용히 머물지를 못했다. 

스티브 디거가 쓴 <잠들기 전에 긍정의 한 줄> 중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각가는 대리석 필요 없는 부분들을 하나씩 쪼개 내버림으로써 아름다운 조각품을 완성한다. 조각가들은 흔히 원래 재료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해방 시켜 끌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서서히 하나하나 쪼개버리는 가운데 새로운 모습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하지만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마귀의 성질 즉 죄성이(원죄) 육·영혼 안에 뿌리박혀 마귀의 노예로 전락해 버렸다. 

하나님은 뛰어난 조각가이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불필요한 울퉁불퉁한 내 자아 덩어리를 하나씩 서서히 깎아내시고 쪼개내어 버리신다. 큰 아픔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조각가에게 나를 온전히 내맡기지 않으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작품이 될 수 없다.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도 결코 해방될 수 없다. 

내 안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자아를 깨뜨리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생기를 잃어버린다. 영혼의 성장도 변화도 없다. 은혜의 수로도 막혀 버린다. 그러면 점점 시들어가고 뿌리도 썩어들어간다. 그런데 우리는 나(我)를 깨뜨리기 싫어서 곧잘 아우성을 친다. 

<다이아몬드 인생>에서 저자는 4C라는 기준에 의해 다이아몬드 가격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캐럿(Carat), 투명도(Clarity), 컬러(Color), 컷(Cut)이 그것이다. 특히 커팅을 강조한다. 커팅은 원석인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높여주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빛나게 해 주면서, 비로소 모두가 황홀해하는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커팅이 중요하듯이, 우리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르고 갈고 쪼고 닦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고난을 선용하셔서 우리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단단한 자아들을 하나하나 깨뜨려 가신다. 하나님이 가시 같은 사람을 내 곁에 두신 것도, 나를 깨뜨리기 위함이시다. 남을 정죄하기 전에 나를 내려놓고 내 옥합을 깨뜨려야 한다. 배신, 중상 모함, 각종 질병과 불의의 사고, 삶이 무너져 내리고 살 소망이 끊어지는 듯한 시험 풍파 등. 모두가 내 자아를 깨뜨리기 위한 선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한 사도바울처럼 오늘, 매일매일, 분초마다 자아를 깨뜨려야 한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며 살아가는 삶이 주님을 얻는 길이다. 마귀적·세상적·정욕적인 마음과 행실을 맑은 물로 닦고 자르고 갈고 쪼개야 한다. 

거룩한 새사람을 덧입기 위해서는(엡4:22-24) 내 삶을 몽땅 깨뜨려야 한다. 저절로 다이아몬드는 빛이 나지 않는다. 수많은 연마와 세공을 통해 영롱한 빛이 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시험 풍파와 연단을 통해 우리 안에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쪼개지고 잘려 나가서 거룩한 빛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 40년 연단 과정을 거처 옛사람 60만 명을 모조리 죽이고 산산이 부수고 깨뜨려야 한다.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연단을 받으며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져 나가는 것이다.  

“자아가 죽을 때 영은 자아로부터 벗어나 거룩한 대상에 넘겨진다. 나는 이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죽음은 영혼이 어떤 것에서, 또 어떤 것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 행복한 영혼의 유월절이며 약속의 땅으로 이주하는 것이다.”라고 순전한 사랑에서 잔느 귀용은 말했다. 

자아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참된 경배의 기도이다. 나(我)를 죽이고 내 삶이 전부 깨어져 정결해질 때 우리는 마침내 약속의 땅, 천국에 이를 수 있다. 기다리기 힘들고, 포기하기 힘들고, 낮아지기 싫고, 고통받기 싫고, 용서하기 힘든 것은 결국 못난 자아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아낌없이 깨뜨리신 주님 사랑 안에 거하면 무서울 게 없다. 버거울 게 없다. 사랑 안에서 걷는 영혼은 자신도 피로하지 않고 남에게도 피로하게 굴지 않는다. 

깨어지는 쓰라림과 고통과 아픔을 겪지 않으면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거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차지하고 싶으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 된다. 고생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마음의 단련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부수어질수록 하늘과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고생을 달게 받으며 오늘 주님 앞에서 내 삶을 깨뜨리자. ‘주님께라면 아깝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내 옥합을 아낌없이 깨뜨리자.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내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어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와 같이 부어질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주님께로 달려가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