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의 위험(On the Danger of Compromise)

율법의 첫 계명 하나만으로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함에 대한 모든 변명의 여지를 말살시켜버립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10:27). 이것은 주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에 관하여 우리 마음의 어떤 핑계나 유보의 여지도 남겨놓지 않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힘과 능력뿐 아니라 생각과 뜻마저도 요구하십니다. 감히 누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주님의 법을 숙고하여 부지런히 그분의 거룩한 뜻을 기꺼이 성취하지 않으려는 기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하시는 것을 완전히 마음에 새기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그 사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바로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해 할 뿐 아니라, 그 부르심에 자유한 심령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잡은 한쪽 손을 놓지 않으면서 적당히 타협하려 하는 사람은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무리 가운데 거하는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주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비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여기까지는 가지만 그 이상은 넘지 않으리라.” 이보다 더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지시하는 것이 과연 합당합니까? 종이나 신하가 이처럼 마음으로 임무 완성을 피하고, 그 충성을 수치스럽게 여겨 반쪽짜리 섬김만을 보인다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런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 자에게 왕 중의 왕께서는 과연 뭐라고 하실까요?

때가 찼습니다. 이제 곧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합시다. 절대 쇠하지 않는 영원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흠모합시다. 이것은 주님 외에 다른 사랑을 찾지 않는 영구적인 젊음을 줄 것입니다.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이 비참한 세상에서 등을 돌립시다. 얼마나 많은 위인이 차가운 그늘아래서 죽어갔는지요! 우리도 그토록 사랑하는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곧 다가옵니다. 무상함, 약함, 어리석음 등의 표현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은 무가치함 그 자체이자 사라져가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간절한 열망에 관하여(On Using Eager Aspirations)

영성을 높이거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종이라는 확신을 얻고자 지독한 열심과 야망을 갖는 일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사랑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높여주는 이런 종류의 성공을 추구합니다.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거룩함을 추구한다거나, 유명한 사람의 인정을 받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자기 사랑을 억제하고, 스스로를 낮춰 무명(無名)함과 업신여김마저도 용납하며 주님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완전함에 대해 듣거나 읽는다고 해서 완전해질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이기보다 조용히 주님께 집중하십시오. 모든 허례허식을 던져버리고 진정한 거룩함에 전념하십시오. 

말을 줄이고, 누군가에게 보일 것을 신경 쓰지 말고 행하십시오.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나 어떤 영적인 책보다도 하나님께서 친히 많은 것을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알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난한 심령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무엇을 더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오직 덕을 세웁니다(고전8:1). 주님의 자비에 집중하고 그 안에 자족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부인한다면 이보다 더 위대한 지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의 반만큼만 행해 보십시오.

논쟁과 호기심을 통해 진일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만인지요! 항상 낮은 곳에 거하고, 절대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만 속한 것들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왕도」, 프랑소와 페늘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