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후 열린 파란 하늘과 빨간 열매들, 숲 그늘 속 초록 위로 반짝이는 씻긴 잎새의 반사 빛 눈부심….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것을 그려야 해. 색감이 사라지는 백색의 순수를, 주님이 만드신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이 황홀한 찬미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만드신 주님의 악기들이 분명하다. 더구나 형형색색의 꽃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마음에 악심이 없고 사욕이 없는 시간에 이런 경이로운 자연을 접하며 창조주를 떠올릴 수 없는 이라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자이다. 그가 훗날 만날 심판대에서 그는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라며 공포에 떨게 될까. 반면 언제나 어디서나 조물주의 신비를 보며 베푸신 선물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던 이들은, 그 거룩하고 장엄한 심판관 앞에서 얼마나 가슴이 설레며 이제 곧 들어갈 천국이 얼마나 기다려질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시골 살기가 시작되면서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도처에 있음을 본다. 헨리 소로가 최소한의 가난으로 머물렀던 월든 호숫가나 니어링 부부가 20년 동안이나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던 버몬트 숲은 아니어도 주님의 작품들이 주인을 경배하는 것을 매일 듣고 본다. 악하지 않은 만물들이 주님을 찬미함을 이렇게 가까이, 이렇게 매일 볼 수 있음은 주님의 은택이다.

하나님은 탐식으로 오염된 몸을 치료하는 풀과 열매들을 곳곳에 두셨다. 밟히고 버려지는 잡초 속에도 신기한 약효들을 넣어 놓으셨다. 그리고 각양의 꽃들, 아 그들은 온통 주님만을 흠모한다. 해바라기는 의연하게 더 높이 비추는 주님의 빛을 향하지만, 수줍은 제비꽃은 밑에 피어 주님의 걸음걸음을 찬양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천사의 외침처럼 열리는 나팔꽃의 찬미, 보석처럼 반짝이는 데이지는 밤새 기도하듯 숙인 얼굴을 낮 동안 활짝 들어 마음껏 빛이신 주님을 향한다.

주님이 걷는 곳마다, 주님이 앉는 자리마다, 주님이 서고 누우신 곳마다, 만물은 이 신묘한 창조를 경탄하며 작은 사랑조차 받아주시는 주님께 감격해하는 것이다. 바람은 춤추듯 사랑을 나르고, 빛들은 곳곳에 그 열기를 전한다. 꿩과 비둘기의 화려한 빛깔, 오리가 조용히 그리는 물 위의 실선들, 연둣빛 논 속 왜가리의 절제된 동작들…. 


눈부시게 떠올라 한껏 대지를 덥히던 태양이 멀리 산등성이로 사라져갈 때 노을은 또 다른 빛의 세계가 뿌려질 것을 예고한다. 점점 더 하늘이 캄캄해지면 동방의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했던 때처럼 수많은 별의 무도회가 펼쳐진다. 마치 멀리 천국의 창문이 열려 하나님 대전에서 춤추는 천사들의 실루엣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일며 경탄이 터진다.

아, 이 만물 속에 나는 누구인가. 주님은 왜 나를 만드시고, 왜 이렇게 살게 하시는가. 이런 삶을 주시고 영혼을 이끄시는 주님은 누구신가. 보잘것없는 미천한 자에게 이 신비한 창조 세계를 여시는 주님은 대체 누구신가.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