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우리와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께 굴복해야 합니다. 

세상이 정욕과 쾌락으로 당신을 유혹할 때 얼마나 망설이거나 저항했습니까? 선을 저항할 때만큼이나 악에 대해 완강히 저항해보았습니까? 우리는 타락하여 부패하고, 길을 잃어버린 채 헛되고 관능적인 쾌락을 탐닉함으로써 마음과 이성의 가장 근원적인 양심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정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스스로 그런 것들을 택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을 내어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의 손이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꺼려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명백한 부분에서 매우 미묘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혹시 너무 쉽게 믿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참된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입장을 바꿔버립니다. 사실 아무것도 드려본 적이 없으면서 모든 것을 드려도 결코 다함이 없으신 분께 너무 많이 드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끝까지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기 원하는 마음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것도 부끄러워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악을 선택하는 데는 용감하고 주저함 없으면서 선을 선택하는 데는 소심하고 위축되어 세상 앞에 부끄러워합니다.

과거에 당신이 악을 향한 세상의 정욕을 따르던 것과 같이,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선을 향한 이끌림을 단순히 따르십시오. 진정한 신앙에 비춰볼 때, 이 원리가 옳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거룩하시며 살아계신 분의 법을 자신의 이기주의로 얼버무리며 하나님을 거부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정직한 마음으로 비춰볼 때, 스스로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하나님에 대해 이토록 옹색한 것이 과연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논쟁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신실치 못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으로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마음의 소리에 이제 귀를 기울이십시오. 또한 정직하고 성실한 친구들과 상의하십시오.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했던 맹세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지, 혹시 자신의 회개가 너무 경솔하고 지나치게 용감했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들에게 한 번 물어보십시오. 그들도 당신처럼 세상에 속했던 자들입니다. 세상을 버린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는지, 바벨론에 취하였던 시간들이 과연 시온성의 평화보다 더 달콤했는지 그 답을 들어보십시오.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어떤 십자가를 지게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행복이라면 결코 구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복된 평강을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고통을 이기는 근원입니다. 세상이 과연 그만큼 줄 수 있을까요? 답은 확실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어떤 일에도 항상 기뻐하던가요? 자신에게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만족을 누릴 줄 알던가요?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과 진심으로 행하던가요?

 

무엇이 두렵습니까? 내가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내게서 떠나버릴 것을 뒤로하는 것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지나치게 선을 따르다가 너무 많은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과 자아나 메마른 세상이 주는 매력보다도 더 위대한 매력에 이끌리는 것이 두렵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너무 겸손해지고, 너무 초연해지고, 너무 정결케 되고, 너무 진실하게 되고, 분별력이 너무 많아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너무 감사하게 될 것이 두렵습니까. 하나님과 자아, 덕과 악덕, 감사와 배은망덕, 삶과 죽음, 이 사이에서 선택하기 주저하는 어리석은 세속적 지혜, 곧 거짓 두려움을 버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왕도」, 프랑소와 페늘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