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전진에 대한 잘못된 개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섬깁니다. 지기보다 이기고 싶어하며, 고통 받기보다 위로받으려 하고, 가난보다는 부유를, 쇠하려 하기보다 흥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상실과 희생, 쇠함과 낮아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일지라도 주님께 더 속하기 위해 자아에서 이를 벗겨 내버리는 것을 통해 성장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맥박을 짚어보고, 끊임없이 의사에게 새로운 처방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병이 얼마나 호전되었는지를 말하는 병자도와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나 목회자를 의사를 대하듯이 대합니다. 이런 사람은 손쉬운 선행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결코 마음으로부터 그 이상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영적 지도자는 자신을 달래주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성숙을 장려하면서 단지 습관과 일상에 매우 소량의 진정제만을 처방하는 자로 치부됩니다. 그러다가 느낄 수 있는 은혜를 빼앗기기라도 하면, 마치 우유를 빼앗긴 아기들과 같이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수단에 집착한 나머지 이를 목적으로 삼고, 자신만을 가장 중시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결핍은 강건한 영을 위한 양식이며 영의 활기를 돋우고,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약한 사람들은 결핍에 좌절하곤 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이야말로 더욱 견고하게 고쳐지고 면밀하게 정화되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무언가 위대하고 완벽한 일을 행해주셔야 한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자신의 뜻을 올려드립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님을 위해 버린바 되고 비방거리가 된다거나, 거룩한 불의 희생 제물이 되어 드려진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이들은 순전한 믿음으로 살기 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지혜를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기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를 위대한 사람으로 착각합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영적 망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련의 올바른 목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우신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기뻐하십니까?”라고 묻곤 합니다. “그렇게 비참하지 않게 하시면서도 우리를 선하게 만드실 수는 없나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저수지의 흐름을 어디로든 바꿀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같이, 주님은 전능하신 손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원하시는 대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장성한 어른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대신에, 어린아이의 연약함과 고민들을 지나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십자가 없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분은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기보다 잠잠히 주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경외할 따름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욕심을 버리며, 모든 것이 자아로만 향하는 그 방향성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전화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고통은 반드시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은 매번 베풀지 않으십니다. 자의식과 이기심에 대해 단번에 죽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로 잠든 사람이 아침에 갑자기 서른 살의 어른으로 깨어나는 것만큼이나 큰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역사하심을 미세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 은혜의 법칙과 자연의 법칙을 따라 행하심으로써 사람의 눈에는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끊임없는 기적의 연속이 되어 주님의 뜻인 믿음의 삶 자체가 흔들리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 속의 생각을 버리게 함으로써 선을 빚어낼 뿐 아니라, 잘못된 추정으로 옳지 못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의 거짓 안목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방관하는 사람은 그 일을 단지 우연으로 치부합니다. 이런 자에게는 진정한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자신의 판단과 인간의 교만한 지혜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은혜의 역사는 더디고 아픈 과정이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신비로운 믿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덕, 배은망덕, 실망, 성공에 뒤따른 파산 등을 이용하셔서 창조된 세상과 세상 것들에게서 우리를 분리시키십니다. 주님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범죄를 낳은 악과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눈을 여십니다. 모든 일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연스러운 일련의 사건들은 화력이 약한 불과도 같이 우리를 서서히 소멸시킵니다. 순전한 사랑의 불로 단번에 소멸되면 좋겠지만 그런 신속한 방법으로 소멸된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는 셈입니다. 이토록 값싸고도 신속한 방법을 통해 완전해지려는 것은 실로 지독한 이기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왕도」, 프랑스와 페늘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