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드개의 카이로스
그리스어에서는 ‘때’를 나타내는 말이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두 가지로 사용된다. 단순한 의미로 전자는 ‘시각’을, 후자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것을 좀 풀어쓰면 크로노스는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 진행되는 일정한 속도와 방향으로 기계적으로 흐르는 연속한 시간(연대기)을 표현하는 것이고, '카이로스', 순간(기회, 찬스)이나 어떤 주관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생이라는 크로노스 시간의 흐름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카이로스적인 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성경의 예가 에스더서에 나온다. 에스더서의 주인공은 에스더가 아니라 모르드개다. 물론 에스더 왕비도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해냈지만,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놀라운 승리를 쟁취한 것은 모르드개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고, 그 뒤를 잇는 바사 제국 아하수에로 왕 때 수산 도성에 살면서 관직에도 오르게 되었다. 일찍 부모를 여읜 사촌동생 에스더를 딸처럼 돌보다가, 새로운 왕비 후보를 뽑는 자리에 에스더를 내보내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바사 제국의 왕비가 되게 했다.
이러한 모르드개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이유가 에스더서 곳곳에 숨어 있다. 왕비가 된 에스더를 양부처럼 돌보았기에 그 후광으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으나, 모르드개는 왕비와의 관계도 숨기고 에스더에게도 민족을 드러내지 말 것을 지시했다. 자칫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이 에스더를 왕비로 간택하게 하신 목적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드러나기까지 비밀로 하는 신중함을 선택했고, 본인 또한 왕비의 후광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배제하였다. 이것만으로도 훌륭한데, 그는 아하수에로 왕 다음 가는 권력자 하만을 두려워하지 않을뿐더러 그의 위협과 권세에도 굴하지 않았다. 만인이 그를 두려워하고 잘 보이려고 애쓰는 가운데 하만에게 무릎 꿇지도 절도 하지 않는 그를 동료들이 타박하니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이해되지 않는 답변을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말렉 사람인 하만에게 결코 고개 숙일 수 없다는 선민사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구절은 다음과 같다.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비겁하게 뒤쳐진 노약자들을 기습하여 죽이고 약탈한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선전포고를 따라, 유대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 같다. 이로 인해 하만의 미움을 사게 되고, 돈 많은 하만은 왕에게 은 일만 달란트를 뇌물로 바치고 날을 정하여 모르드개 뿐 아니라 그가 속한 유대 족속 전부를 진멸하기로 마음먹고 계획을 진행한다.
굳은 기개를 가진 모르드개였을지라도 자기 한 사람으로 인해 민족 전체가 큰 위기에 봉착했기에 급한 마음에 에스더 왕비를 만나 "하나님께서 너를 왕비로 세우심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만약 네가 이 위기를 위해 나서면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을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시고 너는 왕궁에 있을지라도 망하게 될 것이다."라며 나서줄 것을 촉구한다. 왕비의 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에스더도 굳은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모르드개도, 에스더도 대단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런 중차대한 위기 속에서 카이로스(하나님의 때)가 되었다. 본격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사건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에스더를 왕비로 준비하셨을 뿐 아니라 낮은 관직자에 불과했던 모르드개가 모반계획을 막아 왕의 목숨을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 놀라운 것은 당연히 목숨을 구한 왕이 큰상을 내렸어야 했는데 잊고 지나가게 섭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때가 되자, 아하수에로가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가 심심해서 역대 일기를 사관에게 읽게 하여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르드개의 공을 뒤늦게 발견케 하고 큰상을 내릴 마음을 품게 하셨다. 그 이전에 왕비가 왕의 허락 없이 왕의 보좌 앞뜰로 나갔는데, 화를 입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여 ‘원하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노라.’고 말하게끔 왕의 마음을 녹이는 작업도 해놓으셨다. 그 말이 달콤함에도 에스더는 지혜롭게 바로 원하는 바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도록 잔치를 베풀 때에 와주십사 초청하면서 하만까지 동참하도록 요청을 한다.
왕이 모르드개에게 줄 상을 고민하고 있을 때 ‘때마침!’ 하만이 왕에게 찾아온다. 왕은 하만에게 자신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에게 줄 상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라고 밝히지 않고’ 하만에게 묻는다. 하만은 ‘자기 얘기라고 착각’하여 형식적으로라도 왕의 권세를 누려보기 원했던 평소 소원을 담아 이렇게 말한다.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왕이 존귀케 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에6:8-9)
속내가 빤히 보이는 요구다. 왕이 옳거니 하면서 모르드개에게 그리 행하고, 하만이 말을 끌면서 종노릇을 하라고 시킨다. 얼마나 극적인가.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여 오십 규빗(약 23미터) 높이 장대에 매달아 자기를 대적하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본보기를 삼으려 했는데 결국엔 자신이 그 장대에 매달리게 되고, 모르드개가 하만의 지위를 이어받게 된다. 우리말 속담에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는 것을 소름 끼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있다.
에스더가 엄청난 경쟁을 뚫고 왕비가 된 것, 모르드개가 모반 사건을 파훼한 것, 왕이 그 공로와 상을 잊어버린 것, 잠이 오지 않아 하필 그 부분의 역대 일기를 읽게 한 것, 상을 고민할 때 하만이 때마침 들어와 자기 얘긴 줄 알고 모르드개를 높여주게 된 것, 모르드개를 죽이려 했던 장대에 본인이 달리게 된 것, 하만이 왕비에게 도움을 청하려다가 왕의 눈에 왕비를 겁탈하는 모습으로 비치게 된 것, 유대 민족을 싹 쓸어버리려 했던 날이 도리어 유대 민족을 대적했던 이들의 초상 날이 된 것.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모르드개 개인과 민족 최대의 위기 순간에 하나님의 카이로스가 발현된 것이요, 이는 오늘날 좌절과 위기와 슬픔 가운데 낙담해 있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기대하고 기다리며 기도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한다. 에스더서가 진리라면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된다. 우리가 준비할 것은 모르드개가 품은 굳은 절개와 확고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카이로스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제2의 모르드개를 오늘도 찾으신다.                                 


 기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