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꾜회 뜰에 함께 살고 있는 개 굽비오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이고 오늘따라 밥을 안 먹는다. “굽비오,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추운데 어서 먹어. 이거 너 먹으라고 원자매님이 특별히 해 준거야.” 원망의 눈초리로 나를 보는 듯한 굽비오는 애정 어린 내 목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다. “왜 그래 굽비오. 누가 네게 무슨 기분 상하는 말 했어?” 그 순간 우울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는 굽비오가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왜 하필 늙고 냄새나는 개를 들여놔서 밤낮 낑낑거리며 소란스럽게 하냐. 밥만 많이 먹고 똥만 싸는 개를 왜 데리고 왔느냐. 가뜩이나 코로나바이러스로 방역을 철저히 해야 하는데 털도 많이 빠지고 누가 책임을 지느냐. 어디서 저런 개를 갖다 놓았냐고 당장 빨리 내보내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굽비오를 겨우 달래서 밤나무 밑에다 매어놓고 밥을 가져다주었는데 그러한 상황을 아는 듯 했다.
굽비오는 어느 목사님이 키우다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그곳의 땅주인에게 맡겼다. 그런데 며칠 동안 아무것도 주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 빈 건물 뜰에서 굶고 있는 강아지가 안쓰러워 왜 이렇게 방치해 놓았냐고 하자 땅주인은 보신탕집에 갖다 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불쌍한 생각이 들어 돌봐달라고 맡겨놓고 간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쩍 말라서 먹지도 못하고 털도 많이 자라서 냄새도 많이 나고, 누런 눈곱도 끼여 다들 싫어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밥을 주며 가까이에서 지켜보니 예쁘고 귀여웠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가 보살펴 주었던 ‘늑대 굽비오’가 떠올라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어제도 강한 어조로 위생상 안 좋다고 당장 내보내라고 하신 분이 계셨다. 굽비오가 눈치를 챘는지 오늘따라 저렇게 밥을 먹지 않는다. 마치 “날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여기 살게 해 주세요”라며 우는 것 같았다. “굽비오, 미안하다. 널 버리지 않을게. 걱정 말고 어서 먹어. 나는 너의 친구야. 괜찮아.”라고 하자 “정말이죠. 나가라고 하지 않을 거죠. 수사님만 믿어요.”라며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 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니까 개들을 많이 버린다고 한다. 더 심각한 것은 베이비 박스에 아기를 버리는 일이 1년에 120건, 매달 10명의 영아가 유기되고 있다. 최근에 큰 이슈가 된 입양아 정인이도 양부모 밑에 있었지만 학대로 버림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족들, 친구들, 남편이나 아내에게, 혹은 자녀들에게 버림받는 이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양로원이나 요양원에 계신 노부모님들도 코로나 인해 자녀들이 방문을 할 수 없게 되자 버림받은 듯한 슬픔을 호소하고 있다. 뜻하지 않게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나 선교단체에서도 버림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버림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상처이며, 가슴에 피멍이 드는 큰 고통이다. 또한 마음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로 인해 자살을 하는 이들도 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타먹고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인류 최초로 버림받는 경험을 했다.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이와 분리되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버림받은 고통으로 인해 일생을 아파하기도 하고 눈물을 짓기도 한다. 또는 깊은 우울함과 무력감에 빠져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무력감은 또다시 열등의식에 젖어들게 하고, 남들과 비교하면서 불행의 아이콘이 되기도 하고, 평생 분노의 감옥에 갇혀 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은총이 임하면 어떤 아픔과 고통도 뛰어넘을 수 있다.
위대한 성군 다윗왕도 한 때 버림받는 고통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간구하며 위로를 얻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9-10)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71:18)
두 번이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서서평 선교사(徐徐平, 독일, 1880-1934)는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켜 조선 땅에 버림받은 수많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버려진 나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가난하고 헐벗은 조선 땅을 밟았다. 뭉그러지고 악취 나는 그들을 위해 몸이 으스러지도록 헌신을 하였고, 굶주린 고아들을 보면 망설이지 않고 그들을 업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씻겨주었다. “푸른 눈의 어머니”로 불렸던 그녀는 조선의 작은 예수였다. 정작 그녀는 영양실조와 폐결핵으로 온 몸이 부셔지고 망가졌지만, 버림받은 이들을 향한 사랑은 멈출 줄 몰랐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그녀는 22년의 세월을 조선에 헌신하고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장기마저 조선의 의학 발전을 위해 써달라며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하였다. 결국 그녀가 떠나고 남은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동전 7전, 강냉이 2자루 그리고 반쪽을 잘라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고 남은 나머지 반쪽짜리 담요뿐이었다. 최초의 광주시민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를 땐 수천의 광주 시민과 나환자들이 쫓아 나와 “어머니”를 부르며 오열했다.  
우리 주님도 버림받은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수많은 고아와 과부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구원키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위해 하나님께 버림받기까지 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사셀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어 광야 무인지경에 산채로 버림받은 염소처럼, 죄인들을 위해 산 채로 지옥의 고통을 겪으시며 버림을 당하셨던 우리 주님. 하늘도 울고 땅도 울던 그 고통의 순간 우리 주님은 온 인류를 구원코자 버림을 당하셨다. 하나님과 단절되는 아픔을 겪으셨던 주님의 그 쓰라린 고통을 그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으랴. 우리 모두는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요셉도 훗날 총리가 되어 그들을 용서해주었을 뿐 아니라, 용기까지 북돋아 주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50:20-21) 이 말씀을 읽은 때면 나도 모르게 목이 멘다. 지난 날 나 역시도 폐결핵으로 모든 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당한 것 같은 아픔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택한 백성을 결코 버리지도 떠나지도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과거 버림받은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시고 이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살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명자로 부르셨다. 모든 사람에게 내쳐지고 버림받은 앤 설리반이 삼중고를 겪는 헬렌 켈러를 사랑과 인내로 치유했던 것처럼, 버림받은 서서평 선교사님이 버림받은 이들을 사랑으로 보듬은 것처럼 이제는 나도 그들처럼 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죄인은 너무나도 게으르고 악하다. 오늘도 다윗왕처럼 “이 죄인을 버리지만 말아주옵소서.” 울며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간절히 구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버리지 않으시리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뿐이다.
저녁 무렵 굽비오에게 사랑의 악수를 건네자, 한 쪽 발을 쓱 내민다. “굽비오, 너를 결코 결코 버리지 않을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밥 먹어.”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꼬리를 흔들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밤나무 아래에 주님의 평화가 밝게 드리운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