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토굴 새우젓
대천에서 국도로 올라오는 길목에는 유명한 새우젓 산지가 있다. 소래 새우젓보다 훨씬 더 질과 맛이 뛰어나 전국적으로 소문난 새우젓이다. 한때는 전국 매장의 60%를 차지했다니 대단한 인기이다. 이 탁월한 광천 새우젓의 비결은 토굴에 있다. 일제시대 때 파놓았던 폐광산 토굴 속에 넣어 몇 달 동안 숙성시켜 만든, 세월이 익힌 새우젓이다. 요는 토굴 속에서 견디며 다져짐이다.
영혼이 특별해지는 시간도 이 같은 토굴에서다. 모든 것이 외로움을 통해 숙성되지만, 인간의 영혼만큼 고립된 시간 속에서 순전히 달라지는 것은 드물다. 감옥에서든 병실에서든 삶의 고통 속에서든, 원치 않는 그 시간에 영혼은 정제된다. 세상의 재미들이 사라지고 혀의 맛도 사라지면 마치 풀무 불길 속의 빈 도가니처럼, 영혼은 무엇을 담아도 태워버리고 녹여 더 이상 불순한 것과 섞이고 싶지 않은 순은이나 순금을 찾는다.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것도 이 토굴의 시간 속에서다. 인간의 끈끈하고 달착지근한 애정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 중의 하나인지, 소원이라는 것도 얼마나 불순한 욕망의 산물인지 보게 되는 것도 이 토굴의 고독한 시간 속에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택하신 영혼은 토굴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영혼 깊은 곳에 비췄던 하나님의 빛을 간절히 찾는다. 고래의 배 속 어둠 속에서 간절히 탄원했던 요나 선지자처럼. 하지만 그런 갈망을 품을 수 없는 많은 영혼은 그 어둠 속에서 더 상하고 썩어갈 뿐이다. 왜냐하면 그런 영혼들은 문제의 원인을 어둠에서 찾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을 찾는 영혼은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어둠 속에 던져진 자신 속에서 찾는다. 빛을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언제부터 잃어버렸는지, 도대체 어디에서 내 영혼 속 기쁨과 충만함이 멈춰졌는지. 그래서 옆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 애태운다. 예수님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놓쳐버린 그때는, 사물이나 사람의 애정이 즐거운 한때였음을 발견하는 그곳이 토굴이다. 그 춥고 캄캄한 어둠 속에선 아주 작은 한 줄기의 빛만 닿아도 감격적이다. 신적 사랑과 순수 소망이 그 어둠 속 빛에서부터 다시 일어난다.
어둠은 모두 내 안에 있는 전부이다. 미움, 서운함, 이기심, 음란함, 질투, 게으름, 잔학함, 억지, 거짓됨 등의 부정한 전체가 다 어둠이다. 하나님을 떠나 행한 다정함도 친근함도 다 내 안의 어둠이다. 그곳에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님의 빛이 닿을 때, 영혼은 순결한 기쁨으로 떠는 것이다. 토굴 속에서.
썩을 게 썩고 문드러질 게 문드러져야 빛의 싹이 움튼다. 스스로 버릴 수 없는 내 안의 소유들이 던져진 어둠 속에서 썩어 버려진다. 외모도 흉하게 되고 아무도 그를 흠모하지 않으며 오히려 멸시와 조롱을 당할 때 그는 진정으로 숙성된다. 토굴의 새우젓처럼.
욥이 산 증인이고, 요셉도 그곳에서 하늘의 지혜와 총명을 얻었다. 십자가 요한은 「어둔밤」에서 “이 속에서는 사람의 이성이 정화될 뿐 아니라 기억도 그 개념과 지각에서 정화되는 까닭에 영혼의 모든 것을 무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화가 없으면 영성의 맛을 마음껏 다 느끼고 흐뭇하게 맛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습관적이거나 현실적인 애호나 정붙인 것이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사랑이 합일되는 가운데 나타나는 영의 그 심오한 맛을 절대 느끼거나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우리는 토굴의 캄캄한 어둠 속 고독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모해야 하겠다. 토굴새우젓은 그래서 맛이 깊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