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두 번 울었다.
 예루살렘 남동쪽 비탈에 ‘베드로의 닭 울음 성당’이 초연히 서 있다. 사도 베드로의 회개 기념 성당이다. 유럽의 천주교 성당의 첨탑에는 십자가와 함께 닭 형상이 역시 올려져 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닭의 울음으로 베드로가 참회의 눈물을 쏟은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한평생 그는 닭만 보면 그냥 울었다고 한다.
비겁한 베드로! 틀림없는 이력서다. 자기의 두목이 잡히는 날 밤, 용감하다는 수제자는 끌려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것도 ‘멀찍이’(마27:58), 수상쩍은 행보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로 끌려가신다. 인맥은 힘이 있어서(요18:15) 다행히 뒷마당 모닥불의 혜택을 얻어 사태를 관망했다. 위쪽 마당에서는 거짓 증인까지 동원하여 예수님을 죽일 죄목을 찾아내는 살벌한 순간에, 가장 신빙성 있는 측근으로 “나는 3년 동안 예수님과 숙식을 같이 하면서 그를 낱낱이 살펴본 제자입니다. 그는 죄의 냄새까지도 없는 의인입니다.” 증인으로 서둘러야만 했다.
참 증인이 절실히 요구되는 그 절박한 순간! 그러나 그는 비겁한 편을 택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마귀는 잔인성을 들어낸다. “너도 예수당이지?” 연거푸 몰아붙여 세 번이나 그의 신앙 지조를 부러뜨렸다. 자기의 주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노골적으로 부인한 천하에 믿지 못할 놈이다. 위험한 벼랑 끝에, 가련하게 서 있다. 당신의 현주소는 건전한가?
인자하신 예수님은 베드로를 선택하실 때부터 세밀하게 창조주의 눈으로 살피셨다. 무식하고 다혈적인 사람! 그러나 그에게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견하시고는 기도의 못을 박으셨다. “사탄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1-32). 절박한 순간이 좁혀오자,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훈령까지도 내리셨다. 그러나 그는 졸기만 했다. 결국 독사의 입김에 주눅이 들어 일을 저지른다. 바로 그 순간, 두 번째 닭소리가 우렁차게 울렸다. 예루살렘의 닭이다. 드디어 예수님은 베드로가 서 있는 쪽을 향해 눈길을 보내신다. 서로 간에 시선이 동시에 꽂혔다.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 모른다 하는(막14:72) 비통한 실수를 엎지르는 그 깜짝할 순간, 회개의 문고리를 절묘하게 잡았다. 오뚝이처럼, 안전지대에 장쾌하게 서게 된 것이다. 
한국의 교회가 유럽처럼, 노을 진 종교로 추락 될 것인가? 아니면 베드로의 기백으로 찬란하게 회생할 것인가? ‘선교한국’의 웅대한 꿈을 사살할 수는 없다. 2017년을 정유년(丁酉年) 닭의 해라고 불렀다. 닭들이 목청 터지게 울어댔다. 그리고 두 번째 닭이 수소폭탄을 터뜨리면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울었다. 두 번!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저들 탓이라고 당신은 여전히 고함만 칠 셈인가? 내 탓으로 알고 가슴을 쳐야 문제가 뚫린다. 2020년 패자 부활전으로 출전하여 역전승의 우승컵을 기필코 받아내야 한다.
베드로! 죄를 토해내는 항복훈련을 겪은 후, 다시 50일 후 오순절 성령의 불로 자신을 화형 시켰다. 어정쩡한 약골 세월을 완료하고 사탄을 제압하는 용사로 바뀌었다. 그를 농락할 자는 다시 없었다. 이천 년간 기독교를 세우는 강한 반석이 되었다. 멋진 회개, 웅장한 출발이다. 베드로의 뒤를! 엄숙하게 따를 뿐이다.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