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절제
 
작년은 내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축복을 경험한 특별한 한 해였다. 미디어 선교의 사명은 받았지만 그동안 일의 진보가 크게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진리가 빛을 보기 힘든 때라고 여기며 포기하려던 차, 성화된 성도들의 생애를 낭독해서 한 동영상 공유 서비스에 올려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상을 보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미디어 선교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까이서 목도하며 은혜와 감사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올해 하나님께서는 내게 새로운 방향을 허락하셨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말씀을 주시며 사역에 치우쳐 영혼을 지키는 일에 소홀해진 것을 책망하셨다. 일은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나의 삶의 많은 영역에 ‘절제’가 빠져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 중 사랑이나 온유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것은 자주 들었지만 ‘절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절제’는 분명 성령의 열매 중 하나요, 특별히 마지막 때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깨어있으라”는 주님의 말씀도 ‘절제’와 뜻을 같이 한다. 위대한 사도바울도 오죽하면 항상 자신의 몸을 절제 키신다고 고백했을까(고전9:27). 그 또한 타락한 육신을 지닌 채로 복음을 전해야 하기에 늘 자신을 깨어 지켜야 했던 순례자였던 것이다. 하물며 마귀가 온 세상에 들끓으며 역사하는 이 마지막 시대에 자신을 늘 경계하지 않는다면 영혼은 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예루살렘의 성자 헤시키우스는 절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절제, 또는 경계는 하나님의 모든 덕과 계명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 말, 생각, 감정에 있어서 모든 복음의 계명을 굳게 지키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
절제는 참으로 영적 활동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특성이다. 이것에 의해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모든 활동이 이루어지며, 악마를 섬기는 일과 혼합되지 않도록 막아준다. 절제는 순결한 마음의 근원이며 신령한 생활이다. 자신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집중시키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는 참된 겸손이다.”
하루 종일 나의 행동, 말, 생각, 감정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새 사람이 아닌 육신의 소욕을 좇는 옛사람에 더 가깝다. 인터넷을 볼 때도 은혜로운 설교 영상보다 세상적인 이슈에 더 손이 간다. 남을 존중하고 세워주는 말을 하기보다도 지적하고 비판하는 말을 할 때가 더 많다. 생각과 감정은 거를 새도 없이 정욕에 충실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선한 사업에 열심일지라도 모든 일에 절제를 더하지 않으면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나라는 존재이다.
헤시키우스는 절제는 한 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연습해야 하는 것이며 주의 깊은 독서와 기도, 항상 자신을 경계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생각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 도우심을 구할 때 산만한 정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정신을 지키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육체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 한다며 육신을 아낌없이 환대한다. 물론 사람이 살아가려면 충분한 음식과 수면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지나치게 음식을 먹는 것은 영혼에 해롭다. 천국을 향하는 깨어있는 순례자는 결코 실컷 먹고 자지 않는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모임의 중심에 ‘음식’이 있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있는지, 먹는 즐거움을 하나님의 영광과 바꾸었는지 말이다.
외적인 성취를 향해 달려오던 발걸음을 돌려 신중하게 절제함을 목표로 삼고자 한다.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지만, 끊임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곧 절제의 능력을 더하실 줄 믿는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결코 썩지 않을 면류관을 바라보며 자신을 깨어 경계하는 일을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겠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