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선교
십여 년 전 성남시의 분당구에 소재한 모 교회에서 중앙 아시아지역에 있는 한 모슬램 국가에 단기 선교 팀을 파송하였는데, 차로 이동 중 이슬람 테러 분자들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결국 교회 부목사인 인솔자와 팀 한분이 살해당하고, 나머지 단원들이 볼모로 붙잡혀 있다가 정부에서 국정원장까지 현지에 파견하여 테러분자들과 협상을 하고 얼마간의 금전을 지불하여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내의 불신자들의 여론은 그 사건의 주원인이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공격적인 선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원색적으로 강하게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일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비판일 뿐이다. 다만 선교를 위해선 현지정보를 많이 습득해야 하고, 치밀하게 현지 사정을 파악하여 안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성은 있다.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선교에 대해서 공격적이라고 비판한 그 용어는 적절하지 않을 뿐더러 적극적 선교라고 표현한다면 더 합당할 것이다.
내가 선교지에 와서 복음을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선교사는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사역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프놈펜을 벗어나 다른 주의 시골마을을 찾아다닐 때 사모가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하면 나는 조금만 더 찾아보자고 적극적인 자세로 나갔다. 그렇게 찾다보면 한 마을에 복음을 한 번 더 전할 수 있을 기회를 얻지 않을까 해서다. 그래서 요즘도 주일에 하루 거의 180km가 넘게 운전을 하며 세 개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온다.
사실 그 먼 곳까지 순회를 하면서 가야될 의무도 없고 또한 무리하지 않고 적당하게 하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전해주고 싶은 적극적인 마음 때문에 나는 강행군을 한다. 만약 내가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그만큼 영적으로 손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체력도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사모는 갔다 올 때마다 후유증인지 몸살을 앓는다.
또한 내가 사회 관계망 서비스에 매일 글을 써서 올리는 일도 이들에게 영적으로 유익한 말씀을 단 한 번이라도 더 공급해 주고 싶은 적극적인 마음에서다. 매일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올리는 글들은 이 나라 안의 영적 지도자들에게서는 결코 들어 볼 수 없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캄보디아 교회가 복음의 기본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고, 또한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주일을 범하고 잘못해도 권면이나 책망이 없다. 그 이유는 성도들이 그런 걸 싫어해서라고 한다. 캄보디아 국민성 자체가 남에게 간섭하거나 간섭받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의 목회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처음에 그런 사실을 접했을 때, 이곳의 목회자들의 목회 방식에 대해서 답답하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국 선교사도 마찬 가지다.
그저 빨리 자리를 잡고 교회 건물을 지어 올려야 선교라고 여기면서, 영적 부요함을 얻게 하는 고난 속에서 연단 받는 진리는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현실이다. 최근에는 “핍박을 받는 의미”에 대해서 글을 썼다. 캄보디아는 불교국가라 가족 가운데서 대학교나 직장에서 누가 기독교를 믿으면 그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왕따를 시키는 등 핍박을 많이 당한다. 그래서 나는 핍박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믿음을 확고하게 해주기 위해서 글을 올렸다.
“핍박을 받는 것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확실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 핍박을 허락하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하시는 것이고, 핍박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자녀는 정결케 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결코 뒤로 물러가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반응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2, 3일 동안 600여명 가까이 은혜를 받은 듯 ‘아멘’과 함께 ‘추천’ 버튼을 누르고 갔다. 가까이 지내는 어느 선교사는 내가 매일 올리는 글을 통하여 이, 삼백 명 이상의 현지교인을 목회하는 것과 같다고 격려를 해주셨다. 정말 그 말대로라면 감사할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는 문맹률이 높아 긴 글을 읽기 싫어한다. 그럼에도 말씀을 사모하는 기독교인들이 나의 이 긴 글을 읽고 있다. “죽기까지 충성하라!” 아무튼 남은 삶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충성하기를 원한다.


박이삭 선교사(캄보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