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뚫고 가는 행복한 사람
요즘 직장인 사이에 퍼지는 ‘파랑새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다. 파랑새처럼 행복을 찾아 이곳저곳 날아다니며 기웃 거린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청소년은 OECD 회원국 가운데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왔다. ‘삶의 만족도’ 역시도 계속 꼴찌를 기록하고 있다. 청소년 5명 중 1명은 자살충동을 경험했고, 나이가 들수록 ‘돈’을 행복한 가정의 조건으로 꼽았다. 처음 조사를 시작한 2009년만 해도 행복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학생들이 가족이나 건강이라고 응답한 학생들보다 많아지는 지점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올해에는 중학교 3학년까지 내려왔다.
염유식 교수는 “사회나 부모가 암묵적으로 돈이 최고라는 걸 보여주고 있어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며 “행복해지는 방법을 아이들이 습득해야하는데 이런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불행한 어른들이 양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점점 돈이 행복의 기준이 되어가는 청소년들을 보니 현시대의 사회현상을 반영하는 듯 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인양 이를 얻고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 평생 돈만을 좇다가 정작 죽는 순간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데도 말이다. 우리의 행복지수는 결코 지식이나 건강이나 명예나 성공이나 물질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근래에 나 역시도 삶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파랑새처럼 행복을 찾아 마음속으로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며 기웃거렸다. 주님의 일을 하도록 불러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했고 행복하다고 고백했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반복되는 일들 속에서 삶이 무미건조해지면서 점점 지쳐갔다. 동시에 나의 행복지수와 삶의 만족도도 점점 낮아졌다.
특히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신문발송 날짜가 다가오면 마음이 착잡해지면서 적잖은 부담감이 밀려오곤 했다. 사람들을 섭외하고, 우체국까지 신문을 운반하는 차량과 운전자를 섭외하고, 여러 가지 공동체의 행사 일정과 겹치지 않는지 점검하고,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며 섬기는 일들이 어렵게 느껴졌다. 때로는 “이번에는 봉사자들이 많이 왔네요. 다음에 저는 안 와도 되겠어요.”하면 괜히 불편함과 섭섭함이 일어났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대신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불쑥불쑥 올라왔다. 몇 달 동안 기쁨 없이 그저 주어진 임무이기에 기계처럼 움직였다. 궂은일이나 부담스러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 영적 태만과 좀 더 활기차고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싶은 허영과 교만의 독이 내 마음 안을 뚫고 들어와 서서히 자라잡고 있었다.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을 듣는데, 가사가 소낙비처럼 마음의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기도가 절로 나왔다. ‘주님, 저는 너무나 오만하고 이기적입니다. 섬김의 귀중함을 잊어버리고, 편안함이 좋아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을 섬기려 이 땅에 내려오신 주님을 생각할 때, 아이 같은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했다. 정신이 번쩍 들며, 회개가 되었다.
알버트 슈바이처(1875-1965)의 삶을 기억해 본다. 그는 군복무 중 휴가를 받아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하게 보내다가 다음과 같은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 그리고는 곧 결단을 했다. “나는 30세가 될 때까지 학문과 예술을 위하여 살도록 허락받았다. 그 후에는 직접 인간에 대한 봉사에 이 몸을 바치리라.” 이미 20대에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라는 저서로 유럽 전역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신학자였으며, 바흐 해석에 탁월한 오르간 연주자이자 음악이론가로 정평이 나 있었고, 27세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젊은 교수가 되었지만 흑인들을 섬기기 위해 의학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의사, 철학자, 신학자, 교수, 목사, 음악가와 저술로 당시 사회에서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부와 명예와 편안한 생활을 버리고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떠났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그곳에서의 의술활동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병원 건물이 없어 닭장을 진료실로 사용하였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온 군데에서 밀려오는 환자를 치료하고, 저녁에는 병원을 고치며 생활했다. 더욱이 높은 습도는 약품 보관에 어려움을 겪게 했고, 환자들에게 약의 사용법을 이해시키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진료는 피로를 더욱 가중시켰다. 그야말로 최악의 환경, 최악의 컨디션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다.
“이곳에서 흑인들을 진료하고 돕는 기쁨에 비하면 잠시의 이런 불편함은 별것이 아니다. 부족한 물자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직 많다. 상처가 곪고 헐어 고생하던 환자가 마침내 깨끗한 붕대를 감고, 이제는 상처 난 발로 진흙 속을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여기에서 일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다.”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슈바이처가 기차를 타고 갔을 때의 일화이다. 기자들이 그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왔다. 그런데 1등 칸과 2등 칸을 살펴보았지만 그는 없었다. 그러다가 3등 칸에서 사람들을 진찰하고 있는 슈바이처를 발견했다. 한 기자가 물었다. “박사님, 왜 3등 칸을 타고 가십니까?” 그러자 웃으며 대답했다. “이 기차에는 4등 칸이 없더군요.” 기자들이 어리둥절해하자 다시 말했다. “저는 편안한 곳을 찾아다니는 게 아니라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다닙니다. 1등 칸이나 2등 칸에 있는 사람들은 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말년, 프랑스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자네가 이 편지의 회신을 받기 전에 아마도 난 죽을 것 같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더라도 슬퍼하지 말게나.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축복받은 자로 생각하고 싶네. 불쌍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업에 60여 년 간을 헌신할 수 있었고, 오늘 90세의 노인이 된 이 순간까지 계속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이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의 섭리이신 줄을 확신하고, 나의 진심을 다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드리고 싶다네.”
슈바이처는 행복의 비결을 이렇게 가르쳐 준다.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섬김이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일한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의 열쇠는 성공이 아니라, 행복이 성공의 열쇠입니다.”
시간을 뚫고 이 땅에 섬기러 내려오신 주님의 발자취를 충실히 따랐던 슈바이처의 삶은, 5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도 우리에게 울림을 안겨준다. 낮아지면 두려울 것이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려는 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는다. 오늘이라는 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많은 이웃들을 섬긴다면, 행복자다. 다시 우뚝 일어나 인내와 겸손과 희생으로 이웃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시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는 그날까지 쉼 없이 달려가자.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