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기+채우기

갓난아이가 말을 하기 위해 쉼 없는 옹알이를 하듯, 새로운 지식이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인체활동에도 들숨을 마시려면 날숨을 내뱉는 것처럼 쉬지 않는 작용 · 반작용 원리가 적용되어야만 생존할 수가 있다.

낡은 부대에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고, 눈물로 씨를 뿌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긴 하다. 마른 뼈가 살아나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목도하기도 한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지향하는 신앙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양다리 걸치기 신앙이라고나 할까? 익숙해져버린 낡은 부대를 끌어안고,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씨를 뿌리지 못한다. 눈물의 기도와 희생의 땀은 등한시 한 채 분주한 삶을 살면서도 새 부대, 알찬 열매, 원대한 성취를 바라고 꿈꾼다. “시작은 미약하나, 후에는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좋아하고 성경 구석구석에서 간추린 알짜배기 성공스토리를 흠모한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19:21). 청년은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갔다. 가진 것을 버리지 못했기에, 하늘의 보화로 채우지 못했다. 만약 예수님께서 네 재물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잘 관리하고 풍성히 쓰면서, 나를 따르라고 했다면 주님을 따라갔을까?

말씀을 묵상하면서 때론 우리도 내 뜻과 소유를 버릴 수 없어 근심하며,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외면하고 어긋난 방향으로 갈 때가 있지 않은가? 버릴 수는 없고, 채우기만을 바란다면 결국 가장 귀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버리고 채우기가 공존할 때에만 궁극적인 보화(생명)를 얻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창녀였다. 아름다운 외모로 뭇 남성들을 사로잡았으며 자신의 영혼과 많은 영혼들을 헤어 나올 수 없는 악으로 내몰았다. 신봉하는 남성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수한 손가락질을 당했다. 불붙는 정욕과 세상쾌락에 깊이 빠져있었지만, 자신의 외모에 취해 따라오는 남자들에게는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깊은 갈등,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한낱 창녀로서 보통사람들과 섞일 수 없는 치욕과 더러움에 떨고 있었다. 대부분 자신을 가까이 하지도 않고 경멸했지만, 예수님만은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시며 다가오셨다. 그 어떤 비판이나 정죄를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그 영혼에게 빛을 비춰주셨다. 빛이 비춰지는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은 잠을 자던 마리아의 영혼은 반응하였고 어느 샌가 강렬한 빛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서 인생역전을 떠올리거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간주해 버리기 쉽다. 과연 그럴까? 영적 음행을 순간순간 저지르고 악습에 빠져서 은근히 즐기면서도, 영적인 깊은 잠을 자고 있으면서도 난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가? 내 안에 똘똘 뭉쳐진 자아 깨뜨리기를 거부하고 은근히 자랑하면서 난 썩 괜찮은 사람이고 하나님께, 사람보기에도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이 판단하기에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영혼이었지만, 과거의 생활과 악습을 다 태우고 비워서 예수님으로만 채워나갔고, 결국에는 성녀가 되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는 옛것을 버려야 한다. 새 부대를 얻기까지,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버리고 비우고 씨를 뿌려야 한다. 모든 잎을 다 떨어내고 벌거숭이가 된 겨울나무가 싱그러운 영혼의 봄을 준비하라고 재촉하는 듯하다.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