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헬라어로 시간을 뜻하는 말에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있다.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 흘러가는 자연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이다. 구체적 사건 속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시간, 개인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접목된 시간을 카이로스라 부른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말씀하신 이 ‘때’가 바로 카이로스다
삶의 시간들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소망하는 기도가 응답되는 때, 성경에 예언된 마지막 때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카이로스를 소망하며 반복되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간다.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밥을 먹고, 일터에 가서 어제와 동일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때론 무료하고 답답함을 견딘다.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 물리적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계획하시며 주관하시는 시간이 언젠가는 임할 것이라는 소망이다. ‘카이로스’가 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셔서 한 번에 이루실 것을 알기에 현재를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여호야김 왕 때인 605년의 일이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남유다로 침공을 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되고 왕족들을 무참히 죽이고 다니엘을 비롯하여 상류층 자제들을 포로로 잡아 갔다. 아마도 부모를 잃고 쇠사슬에 결박되어(대하36:6-7) 1000마일이나 떨어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당시에는 분명 암담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여러 속국에서 포로로 잡아 온 탁월한 소년들을 3년간 바벨론식 교육을 시켜 관리로 등용하였다. 수많은 소년들은 크로노스 안에서 바벨론 문화에 점점 동화되어갔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달랐다. 바벨론 대학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풍전등화와 같은 급박한 위기 앞에서도, 공직자의 일에 관여하여 행정관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똑같은 날이 반복되어 이어지고, 한 주나 일 년, 심지어 이십 년도 같은 시간의 연속일 뿐이었지만, 크로노스 안에서 나타난 그들의 신실하고 선한 행함은 기적과 변화를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때에 가장 정확한 순간에 다니엘과 친구들을 높이셨다.
요셉은 성경에 나온 인물 중 누구보다도 카이로스를 기다린 사람일 것이다. 노예로 팔려간 이상 그에게 물리적 시간은 별 의미가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실 것만이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39:2).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그저 견디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구원의 때를 기다리며 넋 놓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성무(聖務)로 만들었고,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노예와 총리의 삶의 질이 같을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가 복직 될 때 ‘이제 드디어 때가 왔구나.’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요셉은 비로소 바로 앞에 서게 된다. 비록 노예의 신분으로 왕 앞에 섰지만, “하나님이 왕에게 그 꿈의 뜻을 말씀해 주실 것”을 담대히 고백한다. 이제 요셉의 삶은 더 이상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구분이 불가한 신앙이 되었다. 감옥에 있던지, 왕궁에 있던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바로 카이로스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선진들에게는 성경이 기록하지 않은 길고 힘든 크로노스의 시간들이 있었다. 때론 그들도 우리와 같이 한숨짓고, 눈물 흘리며, 기약 없는 카이로스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들이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하나님보다 앞서가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고, 나를 가둬놓은 시공간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보았고, 영광의 날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참여하는 증인이 되었다.
우리 삶에도 가장 정확한 순간에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실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할 일은 다니엘과 요셉처럼 하나님의 때를 성실히 기다리는 것이다. 크로노스 안에서 카이로스를 꿈꾸며 일상을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기다림에 지쳐 믿음을 잃어버리고 의심에 가득 찬 기도를 드릴지라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완벽한 믿음이 아닌 최선의 믿음을 드린 선진들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로 갚아주실 것이다. 성실과 진실로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는다. “온 세상 구주로 오시는 주님의 얼굴을 뵙는 영광의 때를 준비하는 일은 다름 아닌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