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맑은 가락이 울려 퍼질 때

무딘 박자감각과 끈기가 부족해 포기한 기타를 최근 다시 잡기 시작했다. 짧은 손가락으로 기타 코드를 잡는 데 손가락 끝이 굉장히 아프다. 손가락 끝에 힘도 없고 다른 줄과 맞닿아서 소리도 무겁고 둔탁하다. 더욱이 튜닝을 하다가 3번 줄이 끊어져서 제대로 된 음색이 나오지 않는다. 언제쯤이나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생각하니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기타를 치기 위해서는 굳은살이 박히는 과정이 필수라고 한다. 기타를 막 배우는 분들의 경우 3개월에서 1년까지는 손가락이 까지고 아무는 과정이 계속 된다. 줄을 한 번 잡고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면 손가락 근육이 기타 줄 코드 모양에 맞춰 단련되어, 쉽고 빠르게 잡게 된다. 근육이 모양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굳은살도 생기게 된다. 1년이 지나 3~5년이 되기 시작하면 아물었던 자리가 굳어지고 또 그 위에 까지고 아물고를 반복하여 굳은 살 층이 쌓이게 된다. 그리하면 기타를 계속 쳐도 아프지 않게 되는 경지에 오른다고 한다. 굳은 살 여러 겹이 모여 완성되는 것이 기타리스트 손이다.

하나님의 코드에 맞추어 질 때까지 광야연단과정을 거치면서 육적인 행실이 벗겨지고 아물고, 또 벗겨지고 아물고 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까지고 벗겨지고 아물고 하는 과정에 고통은 반드시 수반된다. 하지만 종종 과정을 단번에 뛰어넘으려고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조바심에 너무 과속을 하여 제풀에 넘어지기도 하고, 벗겨지고 아물고 하는 과정이 번거롭고 고통스러워서 그냥 포기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도달하기까지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서 꾸준히 좁은 길을 달려가야 한다. 그 어느 누구도 단번에 맑고 투명한 아름다운 멜로디를 낼 수는 없다. 고통을 참는 법을 배워야 하고, 상처 난 부분이 아물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는 법도 배워야 한다.

맛없는 음식을 즐겨 먹고, 가난하게 먹으며, 거칠게 입으며, 일을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하며, 오랫동안 깨어 있고, 일찍 일어나며, 기도를 많이 하고, 읽기를 자주 하며, 감각적인 낙을 찾지 않고, 자기의 몸을 엄히 쳐서 철저히 복종시켜나가는 경건의 훈련을 부지런히 쌓아가야 한다.

믿음의 단단한 굳은살이 생기기까지 뼈마디 하나하나,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발가락 마디 하나하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양에 맞추어져야 한다. 이는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육신의 껍질인 자아가 깨어지고 벗겨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와 영혼에 기억되기까지 쉼 없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려면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하고, 사랑해야 한다. 순간순간 주어지는 매일의 짐을 자기를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한다.

내게 주어진 짐을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줄을 놓쳐버리게 된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어려운 코드까지도 짚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도에 포기하면 뚝 끊어진 기타 줄처럼, 더 이상 아름다운 영혼의 멜로디를 기대할 수 없다. 저음과 고음의 6개의 줄이 다 있어야만 바른 음색을 낼 수 있듯, 그 일의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다. 무겁고 둔탁한 소리가 아닌 빛의 소리를 울리기 위해 순간순간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 쟁기를 굳게 붙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쉽게 이루려 하는 나의 게으름으로 인해 성령의 맑은 물줄기가 뚝 끊어져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갈 때도 많다. 핀잔을 당하거나 답답하고 거북한 일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포기해버리고 믿음의 줄을 놓아버릴 때도 참 많다.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피우며 버팅기고 있을 때도 참 많다. 조금만 아프고 쓰라려도 사람들에게 벗겨진 살을 내보이며 원망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허울 좋은 명분으로 나 자신을 가릴 때도 참 많다. 믿음의 줄은 적당히 누른 채, 세상의 줄과 맞물려 살아가고 있으니 둔탁하고 불안정한 소리만 내는 것은 어쩜 당연하리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14:22)고 하였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10:32) 하였다. 주님께서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여셨듯이 고통은 천국에 오르는 사다리이다. 한 단계 한 단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갈 때 비로소 익은 열매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

일본에서 기독교잡지를 만들던 콜베 사제는 식자공들과 승려들이 연합하여 잡지 불매운동을 펼치자 많은 일들을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던지 손끝이 헐고 피가 났다. 더욱이 다리에는 종기가 나서 걷기에도 불편했고, 결핵으로 인하여 몇 번이나 쓰러졌다. 그 와중에 동생이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가운데서 결코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았다. 도리어 “십자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십자가는 생각을 순화시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우리에게 오직 사랑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라면서 어려우면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

사랑하며 고통을 겪는다는 것, 사랑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는다는 것,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행복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행복이다.

하나님은 고통에 이르러 견디려는 이에게 그에 맞는 용기를 내게 주시는 분이시다.

지금 당장은 더 이상 참아 견딜 수 없듯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용기도 더해 주시니까 기쁘게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인내로 감내하신 분들의 삶에는 투명하고 아름다운 맑은 가락이 언제나 울려 퍼졌다. 그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코드에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맞추어 살아갔던 분들이었다. 언제나 세상의 줄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영원한 생명의 줄을 얻기까지 쉼 없이 달려가신 분들이었다. 그러기에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무엇보다도 그 고통가운데서 주님을 사랑하기에 힘썼다.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까봐 앞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고통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순간순간 다가오는 고통을 사랑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되는 고통에 지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 증거이고, 하나님의 코드에 나 자신을 맞추어가는 축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초라함으로 인해 도망치고 싶은 때마다 벌거숭이로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 주님을 바라보자.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풀무에 단련된 주님의 굳은 발을 바라보자. 내 영혼에 맑은 가락이 울려 퍼지기까지 고난의 줄로 나를 튜닝해 가시는 그분의 손길 앞에 기꺼이 나아가리. 육신의 껍질을 다 벗어버리는 그날까지, 하나님 앞에 울리는 맑은 가락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