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자가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어느 집회에서 송명희 시인을 초청하여 간증을 듣게 되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씀을 하시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 가운데 그 이름 예수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는 중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이라는 가사가 유난히 마음에 새겨졌다

학교의 문턱도 밟아보지 않은 그녀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홀로 버려진 듯한 골방에서 하늘의 시인으로 거듭났다. 시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어떤 장로님께서 미국에 가서 치료받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이 주신 모습, 이대로가 좋아요.”라면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 한 마디에 장로님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다.

비록 뒤틀리는 몸과 자유롭지 못한 입술이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좋단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통로, 축복의 통로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멸시함을 받은 그 십자가에 마음이 끌리었던 그녀. 출중한 외모도, 출중한 말솜씨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를 붙드는 것. 고운 모양도, 풍채가 없어도 좋다. 사람들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도 좋다.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만이 진정한 소망이요 기쁨이요 가장 값진 보석이기에.

최춘선 할아버지(1927-2001)의 방에 걸려 있던 찬송 한 구절이 생각난다. “온 세상사람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이 한 구절이 마음을 울리고 그토록 감동이 있는 것은 그러한 삶을 몸소 체험하면서 드려진 살아 있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동경 유학까지 하시고 독립투사에 수십만 평의 땅을 가진 대지주였던 분이 모든 걸 나눠주며 하시던 말씀,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라 다 주님의 것이니까요.”

40년이 넘도록 맨발로 다니시며 주님을 전파하시던 분. 통일이 되어야만 신을 신겠다고 하셨다. 온갖 사람들의 야유와 비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다고 하셨던 분. 미치광이 할아버지로 불려도 좋고, 사람들에게 무시와 조롱을 당하고 무자비하게 멱살이 잡히고 내동댕이쳐지고 버림을 당해도 좋다. 이 한 몸 바쳐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맨발이면 어떻고, 옷이 다 해어지면 어떻고, 이곳저곳 가진 것 없이 나그네로 살아간들 어떻고, 사람들의 구경거리와 비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고, 피가 나면 어떤가. 그저 이 땅에 주님의 십자가를 세우면 되는 것이거늘.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은 벌거숭이 몸으로 십자가의 길을 홀로 걸으셨던 주님과 함께 걷는 길임을 알기에 참으로 행복했던 것이다.

이탈리아 플로렌스 공화국의 메톨라 성의 영주의 딸로 태어난 말가리타(1287-1320). 그녀의 모습을 본 아버지는 격분하였다.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먼 추녀였을 뿐만 아니라, 난쟁이요, 꼽추요, 절름발이었다. 더구나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마치 흉악한 범죄자나 한센병 환자처럼 완전히 격리되어 숲속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 불행 앞에서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였다. “오늘 아침에 부모님이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제게 분명하게 알려주셨어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부인당한 것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좀더 가까이 따를 수 있도록 똑같이 취급당하도록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 그토록 가까이 갈 만큼 착하지가 않아요.”

나의 영적 스승이신 선생님(1947-2005)19살 때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해 반쯤 오그라진 상태로 다리뼈가 굳고, 척추와 환도뼈, 목뼈도 굳어버렸다. 꺼칠꺼칠한 보리꺼럭으로 옷을 해 입은 것처럼 늘 온몸이 찍어 당기고 욱신거리셨다. 고개를 좌우로 돌릴 수도 없을뿐더러 누워서도 꽈배기처럼 뒤틀리는 몸으로 인해 마치 쌀 한 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지고 평생을 줄타기를 하는 곡예사처럼 사셔야만 했다. 말년에는 당뇨와 고혈압, 뇌경색으로 오른쪽 뇌세포 4분의 3이 파괴되는 큰 고통을 겪으셨다.

뿐만 아니라 대퇴부가 골절되었지만, 심장이 너무 약하여 수술을 하지 못해 반 깁스만 하셨다. 이로 인해 살짝만 움직여도 뼈가 살을 찔러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을 겪으셨다. 그러한 수많은 악조건과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 일평생을 살아가셨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며 충성스럽게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 나가셨다. 육체적인 실상은 버려진 폐인처럼, 대소변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는 인간 기생충처럼 살아가셨지만,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고백하셨다. 또한 40년 가시밭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을 참으로 좋으신 분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21:42).

그 이름 예수. 사람들에게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려졌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던 우리 주님. 그 버림의 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르던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셨다. 사람들은 온갖 수모와 모욕과 조롱을 당하는 그 십자가를 꺼려하고 기이하게 여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따르는 이들의 심령에 아름다운 보석을 심어 놓으셨다. 세상사람 모두 버리고 떠날지라도 아름다운 보석, 예수님의 생명이 영원토록 내주하게 하시는 놀라운 복을 주셨다.

세상으로부터는 버림받은 자 같으나 그 안에서 평안을 발견하고, 참된 행복을 노래하던 분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홀로 버려진 순간, 그 순간들이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는 은혜의 자리였음을 그분들은 분명코 알았으리라. 이 세상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고 알아주지 않는 삶의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다 지켜보시며 늘 함께 동행하고 계시기에 그 어느 것과도 그 이름의 비밀을 바꿀 수 없었으리라.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나 바보처럼 보이고 수치와 굴욕을 당할지라도 주님과 독대하며 걸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초라해 보이기 싫고, 외면당하기 싫고, 버림당하기 싫은 자존심 때문에 주목받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고 싶고,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나의 허영심과 탐욕들.

버리는 기쁨, 버림당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결코 십자가의 놀라운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리라.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세상의 끈들을 끊어버려야 한다. 천국을 위해 험난한 가시밭길을 사랑하며 가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까지 거친 광야 길을 묵묵히 모든 자아가 깨어지는 그날을 소망하며 가야만 한다. 예수님, 그 빛나는 이름의 비밀이 내 안에 들어와 온전히 새겨지는 그날까지 쉼 없이 달려가리라!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