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신령한 위로를 받는 사순절
 
나를 드리며
사순절은 전통적으로 엄격한 절제 생활을 원칙으로 했다. 초기 수세기 동안 부활절을 앞둔 금식 준수는 매우 엄격히 지키며 금식은 모든 식사를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 되기 전에 하루 한 끼만 먹는 금식과 또 육식과 기름진 달걀과 우유로 만든 음식을 금지시켰다. 사순절 기간에 문화로는 연극 무용, 연애, 결혼 오락행위나 화려한 의복과 연회 행사가 금지되었다. 그런데 엄격했던 사순절 금욕이 다소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9세기 이후 오후 3시가 넘으면 식사를 하게 했으며 또 15세기에는 점심 식사도 허용하고 물고기와 우유로 만든 음식을 허용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오늘날도 엄격하게 물고기도 유제품도 금지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금식과 절제와 금욕을 강조했는가?
금욕과 절제는, 나의 욕망을 제어하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을 받으신 예수를 생각하며 죄인 된 내가 죽는 것이다. 내 죄를 돌아보며 다시는 죄의 생활에 들어가지 않고 거룩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기 위해 금욕과 절제를 하는 것이다. 오락과 폭식을 하고자 하는 욕망과 놀이와 사치와 자신을 나타내는 자랑 등을 사순절 동안에 절제하며 주님의 삶을 훈련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영적 훈련 기간이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금생 최고 육체의 연습은 ‘절제’라고 성경은 말한다. 절제는 자신을 쳐서 복종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므로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하는 거룩한 행위이기에, 정말 작은 절제라도 그것을 끊어가는 과정에서 누리고 싶은 욕망을 제어할 때,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마음에 영적인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영적인 위로다. 나는 그렇게 주님께 드려지고 그분과 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담긴 애정과 욕망들을 향해 이번 40일간은 좀 죽어라, 라고 하면서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다.
절제의 열매를 맺고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사납고 절제하지 못하는지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범행에 대한 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일상에서 드리는 절제가 사회를 지탱해 가는 중요한 요인이 됨도 생각해야 한다. 영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절제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덕목이다. 먹는 것도 절제가 필요하고, 입는 것도, 시간을 관리하는데도 절제가 필요하다. 또한 미디어, 사람, 취미 생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절제의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조건들이다. 절제하는 속에 주님이 주시는 맑은 영이 느껴질 것이고, 그 속에서 누리는 평안도 분명 함께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사람에게 주신 본능을 적절히 사용하면 선물이지만 지나치면 인간의 파멸이 오고 인간성이 파괴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제훈련을 잘해야 한다.
금욕주의는 육체의 모든 본능 즉 욕망들을 철저하게 금하고자하는 주의인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절제생활은, “절제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순간순간 자기를 극복하고 온전한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절제하지 않을 때는 육신에 속한 행실로 육적인 열매만 맺을 뿐이다. 광야연단을 통과하면서 철저한 절제생활을 해야만, 모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지기 때문에 절제는 강조되어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또 사랑을 비롯한 모든 덕을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필수적이다.
높은 것을 더 사모하면서 가는 것이 우리의 영성생활이다. 실패하더라도 더 실천해야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도 많다. 영적인 깨달음도 크다.
20살이던 때 빨리 60살이 되고 싶었다. 그럼 죄를 좀 덜 짓겠지, 하는 맘이 들었다. 그런데 죄는 나이가 먹는다고 덜 해지는 것이 아님을 세월이 가면서 절감하게 된다. 누가 더 영적 훈련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치열하게, 철저하게, 은밀하게, 영적훈련을 하면 변화 되고 성장한다. 그것을 지탱해 주는 중심이 절제다. 육적인 것을 끊으면 영이 맑아지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다. 그러다보면 더 성장하고 싶어진다. 이 영적매력을 끊을 수 없어서 성자와 성녀들은 일생을 자신을 닦는데 다 사용했다. 육적인 것을 끊기 위해 가정이 있는 부부가 오누이처럼 정결하게 살았고, 혼자 수도하는 삶을 살았으며, 세상과 함께 할 수 없어서 그들만의 거룩한 공동체를 일구기도 했다. 누가 그 길을 차지하는가가 영적으로 성공하느냐 마느냐를 좌우한다. 그 중심에 절제가 있다. 
우리가 좁고 협착한 길을 갈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 길에 맛과 기쁨을 알게 된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좁은 길을 가야 한다.
위로받는 사순절
사순절은 자신의 영적 수준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기간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절제하다 보면 실패하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끊어보면 내가 그것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는지, 또 집착했는지 알게 되면서 나를 돌아보며 자꾸 회개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래서 유익하다.
바울은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피하고 절제할 것들, 참아내고 인내해야 하는 것들을 소상하게 알려주면서, 그것의 결국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하기 위함이라고 명령의 결론을 지어준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사람들, 자기를 돌아보는 사람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성공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주님처럼 용서도 하고, 지친 이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다. 세상이 주는 위로나 인간이 주는 얄팍한 위로는 뒤로하고 누군가를 위해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면서 정작 자신은 하나님께 위로를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형상을 많이 닮았느냐 적게 닮았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세상적인 것을 누리면서는 예수님을 많이 닮을 수 없다. 소유를 버린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큰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까 땅에서 행복을 더 많이 누릴 것인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크게 누릴 것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11:29). 그리스도인들이 쉬는 것은 영성생활을 할 때이다. 그때 예수님께 참된 안식이 있음을 진정으로 느끼며 위로를 받는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다. 우리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기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인은 싸우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군사로 부름을 받아 싸움에 나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한 한평생을 바쳐 싸우는 것이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는 영생이 걸린 싸움이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 여리고성의 전투처럼 승리할 때도 있고 아이성 전투처럼 실패할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실패의 원인은 인간에게 있고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들지 않는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싸움에서 이기는 성도를 위해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에 위로를 받는 삶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라는 찬송가의 고백이, 우리 삶의 고백이고 위로가 되길 바란다.
이 사순절에, 나를 드리며 절제함으로, 영적으로 더 깊어지고 새로워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위로를 충만히 받고 부활의 아침에 감격으로 주님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열망한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