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부르는 소리
교회 뒷산에 미안한 마음이 많았다. 허나 실은 주님께 죄송한 것이다. 군포시청 뒤에서 이전을 앞두고 산 밑의 건물을 주시면 산기도를 다닐 것이라고 기도했다. 건성건성 중얼거린 기도에 놀랍게도 주님은 응답하셨고, 이곳에 온 지 16년이 훌쩍 넘었다. 그런데 그동안 합해서 몇 개월 정도만 산기도를 다니고 말았다. 바로 뒷산의 계절 변화를 보며 날마다 감사했지만, 늘 송구한 마음이 많았다.
세 달 전 어느 날 죄송한 마음이 터지며 갑자기 정신없는 고백을 했다. ‘주님, 이제 힘이 쇠하는 날까지, 주께서 힘을 주시면 산기도를 매일 드리겠습니다.’ 그리곤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런 황당한 고백을 했을까. 왜냐면 나는 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도, 그렇게 기도에 갈급해 하는 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라는 의무감에서, 또 새벽에 두어 시간 하는 기도로 할 일을 했다고 여기는 정도였다. 아, 주님께서 오죽하면 일으키신 감동일까. 그런데 이제는 산이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눈에 아름답기만 한 산이 아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다정함과 넉넉함이 소리가 되어 부르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내게로 와서 나를 만드신 주님을 불러요, 아무도 없는 이곳에 와서 주님과만 만나요.'
대사경회 기간 동안에도 수련원 뒷산을 올랐다. 교회 뒷산 보다 좀 더 크고 가팔라서 숨이 찼지만 여전히 주님은 그곳에서 만나주셨다. 찬 겨울바람이나 미세먼지 따위는 그 감미로움을 방해할 수 없다. 종종 터져 나오는 탕자의 눈물을 막을 수 없다. 그동안 참고 기다려주신 것만 해도 얼마인데, 이제는 그 어떤 핑계나 이유로 주님을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다. 더 이상 나의 사욕과 안락함으로 주님의 근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산이 존재하는 가장 거룩한 이유 바깥에 존재해선 안 된다. 그 산이 부르고 있지 않는가.
햇볕에 따듯해진 바위에 앉아 마을을 보면 얼었던 마음도 녹아버리고, 가만히 ‘예수님’하고 부르면 금새 코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고인다. 탕자를 오래 참아주신 그 사랑이 느껴짐이요, 이렇게라도 이끄시는 그분의 긍휼하신 자비에 감격하는 까닭이다. 때로는 가슴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람이 있지만, 북쪽의 추운 헐몬산도 오르셨을 주님을 생각하면 더 이상 춥지 않다.
얼마 전엔 주님도 가셨다는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 바위 밑으로 내려가다 정말 아무도 찾기 어려울 구석을 발견했다. 이곳에 이사 온 지 16년이 넘도록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곳, 사람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는 이끼와 낙엽으로 덮였던 곳을 찾았다. 깎아지른 바위 밑에 움푹 패이고 나무들로 가리운 곳이다. 주님도 이런 곳을 찾으셨을까. 여기선 누구의 방해도 받을 수 없고 의식할 필요도 없다. 오직 예수님과 그분을 보내주신 하나님만 부르면 된다. 그곳에서의 기도는 얼마나 꿀맛 같았던 지….
보며 즐거워하던 산 속에 들어간 이 후, 산은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해졌다. 산이 부르는 소리가 매일 들린다. ‘어서 와요, 어서 와. 내 안에 와서 쉬어요, 여기서 주님을 불러요.'
주일 날 모든 예배를 다 드린 후 아무도 없는 산 속은 감미롭다. 어쩌다 깜깜한 밤에 가는 산 속은 이불 속 같이 포근하다. 주님이 부으시는 긍휼이시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