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묵상

얼마 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다녀온 뒤부터 죽음에 이를 때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보게 된다.

민족의 영웅이기 전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 어쩌면 그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의심하며 자신이 직접 만져보지 않은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한 도마처럼, 직접 몸으로 뛰어들어 복음을 전했던 행동파 신앙인이었던 것 같다. 순교하기 1년 전, 열한 명의 동지와 함께 왼손 약지를 끊어 혈서로 ‘대한독립’을 쓰며 조국의 독립의지를 굳게 할 만큼 나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분이었다. 그러나 반면 옥중에서 남긴 유묵 중 하나인 “경천”(敬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늘 하나님의 나라를 의식하며 살았던 분이다.

1910 2 14,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는데,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반문하면서 시종일관 의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의 어머니 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편지와 함께 명주수의를 보내며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원치 아니하니, 내세에는 반드시 선량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다시 세상에 나오거라.

자식의 죽음을 앞두고, 수의와 더불어 용감한 죽음을 맞으라고 편지를 쓰는 어머니가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사형집행 전날, 한 시간에 걸쳐 면회를 한 미즈노 변호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인간은 반드시 한 번 죽는다. 이 세상에는 국가가 있어 국경이 있기 때문에 입장을 달리하지만, 천국에는 국가가 없고 국경이 없기 때문에 자네와 나하고도 친하게 마음껏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2세 때 여순 감옥에서 부인에게 보내는 유서 편지를 통해서도 그가 죽음 앞에서 얼마나 의연하고 신실한 신앙인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가 맺어줌으로써 부부가 되고, 다시 천주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천주의 은혜로 천당에서 만나게 될 것이오. 감정으로 인하여 괴로워하지 말고 천주의 안배만을 믿고 열심히 신앙을 지키시오. 어머님께 효도를 다하고 두 아우들과도 화목하고 자식의 교육에 힘써 주시오. 세상을 살아갈 때 마음과 몸을 편안히 하고 후세 천당의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천주께 바치어 신부가 되게 하시오. 할 말은 많지만 훗날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 3 26, 그는 전날 고향에서 보내온 수의로 정갈하게 갈아입고 형장으로 나아가기 전에 약 10분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는 오전 10, 서른 두 살 젊은 나이에 조용히 하나님 품에 안겼다.

독일의 나치즘에 반대하여 싸우던 행동주의 신학자, 본회퍼가 베를린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읊던 독백이 가슴에 새삼스러이 와 닿는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게 말했지. 감방에서 나오는 내 모습이 마치 성의 영주처럼 침착하고 밝고 자신에 차 보였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내가 불운한 날들을 견디는 모습이 승리에 익숙한 자처럼 웃으며 당당해 보였다던데… 내가 정말 남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일까, 아니면 나 자신이 아는 그런 사람일 뿐일까. 새장 속의 새처럼 불안하고 나약하여 누군가 내 목이라도 조르듯 숨차 하는 사람! 꽃과 새소리를 갈망하고 친절하고 상냥한 말 한 마디에 목말라 하지.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인가. 아니면 동시에 둘 다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자기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신은 안다. 내가 그의 것임을.

교수대로 끌려 나갈 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이것이 끝은 아니며, 나에게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진지한 자세로 기도한 뒤 처형대로 올라갔다. 수용소 의사 피셔 휠슈트룽은 “50년 동안 의사로 활동하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적인 모습으로 죽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39세 천재 신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하였다.

공산 치하의 루마니아에서 활동하던 기독교 지도자 요셉 톤은 악명 높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정권의 앞잡이들에게 극한 고문을 당하다가 사형으로 마지막 위협을 가하는 그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들의 최대 무기는 나를 죽이는 것이지만, 나의 최대 무기는 죽는 것이다.

누구나 죽음은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기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주님의 것이다. 나의 나된 것은 모두 다 주님의 은혜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는 죽음에 대한 공포도 두려움도 뛰어넘는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인데(9:24), 참 죽기를 싫어한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말석에 앉아서 조용히 섬기기가 힘들다. 조금만 언짢고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며 보호벽을 만든다. 몸에 조금만 적신호가 와도 엄살을 피우며 좋은 음식을 탐한다. 겉으로는 죽어야 한다고 소리치지만 배고프고, 춥고, 초라하고, 병약한 삶이 싫어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멀리 도망칠 때가 많다. 과감하게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하는데 늘 주저주저한다.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건만, 몸을 사리고 있다. 전무후무한 대환난에 들어가서 적그리스도의 위협 앞에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자가 되지 않으려는지 정말 두렵다.

죽음은 예고가 없다.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 곧 다가올 대환난을 준비해야 한다.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른다. 썩어 없어질 땅의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경천(敬天)하자. 손가락이 끊어지는 단장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악습을 끊어내고 정욕의 세력을 철저히 죽여야 한다. 분초마다 나의 못난 자아가 죽어야 한다.

사도 바울처럼 매일매일 죽을 자리를 찾아 나서자. 구석구석 숨겨진 은밀한 죄들을 낱낱이 드러내어 예수님의 피로 씻고 또 씻어내야 한다.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를 따르자. 순간순간 삶속에서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내일의 순교자가 될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죽고 또 죽어야 한다. 그 길만이 오직 살 길이다. 죽어진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죽고자 하는 자만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고통과 핍박과 죽음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의연하게, 그렇게 죽어가고 싶다. 죽음의 강을 지나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신령한 몸으로 살아갈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