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은총

c5a9b1e2baafc8af_c5a9b1e2baafc8af_81_bdc하루살이가 태어났는데 그날은 하필이면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로 인해 날개 짓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하루를 마감했단다. 욥기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란 결국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것, 그의 수명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갑니다”(욥14:1-2).

사람이 며칠이나 살며 몇 달이나 움직일지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께만 달려있다. 생의 마감 날을 그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인생은 코끝에 있다. 숨을 멈추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아무 것도 붙들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서 살 것처럼, 살아간다. 꽃처럼 피어났다가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갈 이 세상에 왜 그리 집착이 많은지. 사는 것도 한 번 죽는 것도 한 번 뿐인 인생, 보다 더 값지게 살아갈 수 없을까?

하루살이 인생

“내일이면 소경이 된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결산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십시오. 내일이면 벙어리가 된 것처럼 여러분의 입으로 아름다운 말을 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찬양하십시오.” 헬렌 켈러의 권고다.

내일이 다시 주어지지 않을 것처럼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곧잘 “내일이 있는데 뭐 내일 하면 되지”라면서 나의 인생이 하루살이 임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처럼 오늘 하루 죽음의 은총을 부어주셨으면 좋겠다.

조그만 굴욕을 당해도 비굴해 하며 토라지고 원망 불평하며 굼틀거리는 이 못난 자존심을, 조금만 추켜세워도 스스로 목을 길게 빼는 이 교만함을, 조금만 힘이 들고 불편한 일이 닥쳐도 움츠려들며 자라 등가죽과 맞대며 살아가는 이 게으름을, 조금이라도 더 움켜쥐려고 하는 세리 같은 이 더러운 탐욕을, 세속의 물결에 시선이 빼앗겨 영혼의 순결을 잃은 채 살아가는 창녀같이 비천한 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정해놓은 틀을 상대방이 벗어나면 판단하며 가시 울타리를 쳐버리는 아집적인 이 마음에 대못을 꽝꽝 박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사랑으로 매일 죽을 자리를 찾았던 곤솔라따 성녀처럼,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욕심 부리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조금씩 조금씩 죽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예수님의 사랑에 살기 위하여 다른 모든 사랑에 죽겠나이다.”라던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고백처럼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오늘 하루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자아가 죽지 않으면 그 인생은 무의미한 인생이다. 길고 긴 광야연단과정을 다 마치려면 죽음의 은총을 공급 받아야 한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그것이 가장 값진 선물이다.

“네 모든 일과 생각이 오늘 죽을 것처럼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아침이 되거든 저녁때까지 이르지 못할 줄로 생각하고 저녁때가 되거든 내일 아침을 못 볼 줄로 생각하라. 죽음이 어느 때에 너를 찾든지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을 만나게 하라.”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권고처럼 오늘 하루 죽음의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부질없는 자존심 내세우지 않고, 썩어 없어질 육체에 마음 쏟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하루 십자가 안에서 죽어가야 한다. 주님 만날 준비의 생활은 오직 오늘 뿐이다. 그러나 죽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쉽다. 한 번 몸을 불에 태우기도 쉽다. 그러나 매일 매일 자신을 절제하며 죽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순간순간 정욕적인 육체를 매일 매일 순교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죽음의 은총을 조금씩 끊임없이 공급 받아야 한다. 오늘 하루, 하루 종일 비가 오는 괴로운 날이라도 주님을 향한 힘찬 날개 짓을 하고 싶다.

미말에 선 사람들

스스로가 왕인 듯 뽐내는 사람들 앞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다고 하셨다(고전4:9). ‘미말에 두셨다’는 것은 개선행렬의 맨 뒤에 죽음을 당할 포로나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를 의미한다. 이는 사도 바울 자신을 원형 경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짐승과 싸우며 죽어가는 노예검투사(gladiator)로 빗대는 말이기도 하다. 설령 글래디에이터처럼 짐승과 싸우며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죽어갈지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을지라도, 후욕을 당할지라도, 오늘 끝날 인생이라도 영적 싸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도리어 복음을 전한 후 버림받을까 하여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다. 그리고 또한 자신을 가장 작은 자로 고백하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인생은 하루하루가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괴로움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 충실하게 하루살이의 인생을 살아갔다. 하루하루를 죽음의 은총 가운데 살아갔다. 결코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도리어 약함을 자랑하고, 오직 삶 순간순간 십자가 안에서 죽어가길 원하였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과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역설의 의미를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매일매일 죽어가는 삶을 통해 그는 충실한 십자가의 전달자로서의 삶을 일관했다.

“나는 늘 나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몽당연필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생각하시고, 글을 쓰시고, 모든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가끔 연필을 부러뜨리기도 하십니다. 그러면 다시 연필을 깎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을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도록 조그만 도구가 되도록 하십시오.”라고 고백했던 마더 테레사 역시 하루하루를 작은 자로 살아가길 원하였다.

“오! 주여,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비록 매순간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내 심장이 뛸 때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을 사랑하면서 고통 받도록 또 고통을 받으면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은총을 내려주소서. 나의 구세주여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주여, 이토록 당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저를 여기에 두시니 저로 하여금 당신을 사랑하며 또한 그것을 느끼며 죽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여전히 죽기 싫어하는 나의 단단한 자아의 비애 앞에 비안네 성인의 절절한 고백이 가슴에 사무친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점점 죽어갈 수 있다면 더한 행복은 이 세상에 없으리라.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고 싶은 마음을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