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 하이드

출근길에 젊은 남녀가 스스럼없이 애정표현을 한다. 공공장소에서 보란 듯이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본다. 침을 뱉고, 욕하면서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한다. 초록 불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자동차가 침범해있다. 그것을 보는 나의 뇌는 즉시 화를 내고 있다. 참으려 해도 다시 쳐다보며 곱씹어야 하는, 비난과 정죄 당해 마땅한 일들 같다.

타인이 나를 볼 때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겠지만 이건 아니다. 과연 내가 저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행동할까? 추악하고 못 볼 걸 본 건 마냥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진다. 그런 사람도 나름에 장점과 매력이 있을 것인데 순간 한 행동의 단면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고 생각한다는 것이 맞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이처럼 스스로가 난폭하다 여기는 그런 점이 내 안에도 잠재되어 있을 것이다.

가끔 생각나면 반복해서 읽는 소설이 있다. 작품성을 논하지는 못하겠지만, 뭔가 없을 것 같으면서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 인간의 이중성을 아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이해와 몰이해 사이를 오가고 한숨도 무수히 나온다. 인간의 실체를 보는 것이 괴롭기까지 하다. 책을 덮는 순간 자신에게 비춰보고 투영하여 반성하게 된다. 나는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울까를 말이다. 지킬 박사인가 하이드인가.

모든 사람은 하이드와 지킬을 왔다 갔다 하며 공존한다. 하이드로 살고 싶으면 하이드로, 지킬로 살고 싶으면 지킬로, 스스로가 몸부림치면서 해답을 찾고 삶을 살아간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명백히 보여주는 이 소설을 보면서 왜 심장이 뛰고 얼굴이 뜨거워지는지 모르겠다. 하이드로 변신 시도를 하려고 약을 개발하고 있거나 혹은 하이드로 살다가 지킬로 돌아오는 모든 분들과 함께 진심으로 이 글을 공유하고 싶다. 더 와 닿는 것은 요즘 나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평소 느긋한 성격과는 아주 다른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 감사의 신음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게을렀던 내가,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고 남는 시간에 잠을 조금이라도 더 보충하려던 것은 불가능해졌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었는데 혼자 무언가를 한다. 그 과정은 새롭지만 낯설고 설렌다. 낯섦과 전혀 친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낯섦을 반가이 맞이하여 친구가 되니 말이다.

몇 달 전의 삶은 마치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는 경계였던 것 같다. 모습은 지킬이지만 언제 하이드가 출현할지 모르는 상황 같다고 할까. 무거운 중압감과 책임에서 오는 허례의식, 위선, 절망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주님 안에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순간들을 살아가길 소망하지만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적절한 때와 섭리, 간섭하심을 지금까지 체험하며 왔기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하나님은 진정한 자유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하셨다.

마땅히 지킬로 살아가야 할 사람이라 여기며 보낸 세월 속에서 하이드의 가식을 훌훌 벗어버렸을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오묘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고 좁은 길을 가라고 하셨다. 내게 아무리 훌륭한 지킬의 허울이 있다 해도 난 폭탄 하이드를 품고 사는 죄인이다. 영적으로 살아보겠다고 말하면서 정작 삶에 변화가 없다면 몹시 괴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바라보시며 말씀 하실 것이다. 아프게 투쟁하지만 넌 여전히 꽃을 피우기 위해 흔들리는 거다. 긍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는 가녀린 줄기를 곧게, 더 곧게 세우리라.

현재 나름의 경계선을 지정하였다. 물론 하나님이 동행하셨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엔 늘 폭탄과도 같은 하이드가 장착되어있다. 내가 다니는 곳마다 폭탄이 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내 주로 시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자존감이 나를 지키며 살아가게 한다. 여전히 나는 주님의 것이고 그분을 사랑하기에, 내 힘의 근원 또한 그분이시다. 평범함 속 특별한 행복을 누리는 나는, 우리 주님의 작은 꽃이다.

허윤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