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하신 예수여


 진리를 찾다가 진리를 만나 수도자로 산지 어언 20년. 이제 반백의 늙은이가 돼 버렸다. 그러나 지금도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나 살아왔던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며 적극적으로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가 묻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성인들이 말하는 세차게 밀려오는 그 사랑이 그립다. 그 소망이 허례와 위선을 떨며 아첨하는 모양으로 바뀌는 순간을 볼 때면 말이다. 하나님 영광을 말하면서 슬쩍슬쩍 자신을 내세우고, 남의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시하고, 갈수록 무례하고 건방지다. 아주 근본적으로 뿌리로부터 모조리 죄투성이다. 죄의 뿌리는 도대체 떨어지질 않는다. “오, 나의 주님! 이 죄인 괴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생각할수록 죄인 중에 괴수,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영영 가망이 없어 보여 주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자비를 구할 뿐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자비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그 분을 부를 자격도 없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23:22).

가난한 고아와 과부, 집 없는 사람, 객들이 배고파 먹을 것을 찾을 때 남은 이삭이라도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도록 남겨두라 하셨던 자비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자비를 닮은 성군 다윗.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 왕에 의해 긴긴 세월을 쫓겨 다니며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드디어 원수 같은 사울 왕조가 무너지고 그가 왕이 되었다. 사울가의 삼족을 멸하는 것이 통례이건만 다윗은 사울의 손자인 므비보셋을 수소문하여 찾았다. 그 소식을 들은 므비보셋은 “그럼 그렇지. 이제 나도 죽는구나”라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크게 환대하였다. 아침저녁으로 왕의 식탁에 함께 앉게 하면서 왕실에서 왕의 가족처럼 함께 지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다. 므비보셋은 감격에 겨워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9:8)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다윗 왕이 그토록 무자비했던 원수의 손자를 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삼하9:3).

우리가 아는 대로 충복 우리아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던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회개를 한다.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그의 깊은 통회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체험케 했다. 이러한 다윗이었기에 자신 또한 하나님의 은총을 힘입어 자비의 손길을 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베푼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크고 넓은 자비의 극히 작은 한 부분일 뿐이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잘나고 똑똑해서도 아니고 가문이 좋아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왕위에 오른 것을 알았던 다윗이었기에 가능한 고백이었다.

자비로의 초대

자비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다. 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 재미있는 사실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이고 자비나 친절을 ‘크레스토테스’라고 한다.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옛날 초대교회 시절에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친절’이란 말로 혼동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비신자들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크리스챤이라고 말하면 ‘친절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자비는 마음속에서만 머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안에 임재하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외적으로 나타나는 적극적인 친절의 행위를 말한다. 성 파우스티나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자비를 받아들이기 전까지 인류는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자비를 적극적으로 베푸는 자는 주님의 자비를 더 깊이 그리고 주의 완전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예의와 도덕이 바닥을 치고 죄악이 들끓고 있는 온 세상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며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 이 악한 세대에 주님의 자비를 전달하자. 이는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눅6:36). 인생의 밤이 올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 집을 찾아가지만 영적인 고아들은 갈 곳이 없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하고, 그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우리 곁에 얼마나 많은가. 죄악의 먼지투성이로 빈 깡통 하나 들고 울고 있는 불쌍한 영적 고아들이 우리 곁에 있다. 남편 없이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과부들이 우리 곁에 있다. 무너진 가정으로 인해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년소녀 가장들이 우리 곁에 있다. 불신과 이기심의 벽이 너무 높아 경계의 벽을 더 높이 쌓는 이들이 있다.

해가 서산에 지고 있다. 곧 구원의 문이 닫힐 것이다. 더 늦기 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자비의 초대, 예수 십자가 자비의 초대!”라고 외치며 맨발로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셨던 최춘선 할아버지. 그분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는가! 신랑 되신 예수님이 곧 문 앞에 이를 것이다. 육신의 과부든 영적 과부든 순결한 신부로서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하도록 잠든 인생들을 깨우러 가자. 등경 아래 두지 말고 자비의 등불을 환히 밝히자.

황량한 광야 길을 가다 지친 나그네의 쉼터가 되어주자. 희생과 사랑과 겸손을 담아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자.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이들을 참 안식이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초대하자. 이곳에 참된 자비가 있다. 주고 주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랑, 후회도 실망도 없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붙잡고 천국 문에 이르도록 자비하신 우리 주님을 전하자.

그 분이 그립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어느 곳에서나 머물고 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살아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가 없으면 오늘 나도 없다.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힘입어 이웃에게 자비를 흘러 보낼 수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 외로운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셨다. 병든 자를 치유하셨고 주린 자를 먹이셨다.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냥 함께 나누었다. 끝이 없으셨던 주님의 자비. 죽음의 고통도 뛰어넘는 그 자비가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까지도 품으셨다. 그 자비하신 주님의 마음을 누가 다 알랴.

극한 고통 가운데서도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시며 큰 자비를 베푸셨던 스승님이 정말 그리운 때이다. 그분은 매순간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으셨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적극적으로 전하셨다.

“매일매일 순간순간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진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든 행실이 생명책에 기록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빛을 따라 사느냐 죄성과 정욕을 따라 사느냐를 언제나 돌아봐야 합니다.”

천만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일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길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것은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조금 부족한 언행과 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품자. 행동이 느려 매번 늦게 올지라도, 이해가 좀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좀 까다로운 사람일지라도, 자기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일처리를 시원스럽게 못할지라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비의 손을 펴자. 우리의 조그마한 친절로, 우리의 작은 미소로, 우리의 작은 희생으로 희망의 꽃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을지 누가 아는가.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