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지 않은 억울함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저희가 악한 입과 궤사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거짓된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으로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대적으로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시109:1-6).

누구나의 하나님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고 말씀하셨다. 누구라도 예수님께 제한된 사람은 없었고 누구라도 그분을 믿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속죄은총을 베풀어 주셨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하시는 주님은 위대한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사랑에 눈먼 분이시다. 그 사랑이 더 위대하고 깊은 이유는 누구나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나에게 언제나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와 사랑이 있고 나 역시 그 누구나의 한 사람이다. 그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면서 너의 하나님이고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아주 가끔, 혹은 자주, 그 하나님을 내 하나님만으로 만들고 싶은 때가 있다.

바로 억울하고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이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내가 그런 게 아닌데, 내가, 내가, 내가, 정말 억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속을 뒤집어 보이고 싶은 기가 막힌 사연의 주인공으로 내가 등장 할 때 어김없이 누구나의 하나님께 나의 하나님만으로 서 계셔 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있잖아요 주님, 그게 아닌데 이렇게 되었어요.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정말 너무 하십니다. 원망을 한다. 그래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으면, 협박을 하기도 한다. 해결해 주지 않으시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조금 시간이 더 지나면 억울함을 나에게 준 상대방을 ‘원수’라 정의하고 원수를 짓밟고 당당히 서야 하는 이유를 주님께 호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의 하나님은 결코 나만의 하나님으로 서시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

“걱정 마세요. 이 발은 눈이 녹고 얼음이 얼어도 끄떡없습니다. 동상에 걸린 적 없습니다. 안심 하세요” 지하철의 성자 최춘선 할아버지는 발에 대해 누군가 물어오면 매 번 똑같은 대답을 한다. 한 겨울 맨발의 노인이 걱정을 하지 말라니.

그분에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네는 이들은 사실 정작 걱정이 많은 사람들임이 곧 드러난다. 몇 년을 신어도 헤지지 않는 단단한 신발을 신고, 한겨울 바람에도 끄떡없는 따뜻한 옷을 입고, 호호 불며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음식과 방이 있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답답하다. 해맑은 미소 속에 보이는 결코 흔들리거나 불안하지 않은 단단한 평안한 우리의 삶을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니. 왜 최춘선 할아버지는 걱정이 없을까. 왜 최춘선 할아버지는 미운 사람이 없을까. 왜 억울하지 않을까. 왜 누리고 풍족하게 사는 우리는 걱정하고 억울하고 답답할까.

최춘선 할아버지는 그 어떤 물음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남루하고 초라한 육신에 각인되고 영혼으로 울리는 거룩한 진실이 언제나 그분의 입을 통해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예수천당’에는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부러운 것, 부러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법률 없이 일등 부자예요. 미운 사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의 일등 권세예요. 세상 왕들의 억만 배 권세예요.

부러운 게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밉지 않은 그 경지의 기쁨은 과연 어떤 것일까 막연한 그 경지의 실제가 궁금하고 부럽기만 하다. 듣고 또 들은 그 신비로운 경지의 거룩함이야 머릿속 지식으로는 가득하고 뻔한 답처럼 튀어 나오지만 정작 내게 적용되는 범위는 지극히 작고 미약할 뿐이니 말이다.

좁은 길에서도 넓은 길을 기웃거리고, 가끔은 내 길이 단단하지 않은 것 같아 의심이 들기도 하고, 때론 모든 것을 나누어 사랑한 이웃으로부터 배신의 아픔을 당한 것 같은 시간이 오면 걷잡을 수 없는 미움으로 지옥을 오가며 몸부림치는 나의 현실. 내가 정말 작고 초라해 지는 경험을 하며 절망하고 실패의 눈물을 흘릴 때, 그토록 어렵게 진리를 정돈한 최춘선 할아버지는 주님 때문에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는 사람, 최고의 부자로 당당하다.

편견과 오류의 시선에 담대하지 못하고 실패자로 눈물을 흘리는 날, 어김없이 주님은 나의 골방으로 찾아 오셔서 말씀하신다.

“말세에 내가 세상에 다시 올 때에 믿는 자를 볼 수 있겠느냐,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하다”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무엇이 절망스럽고 억울하단 말인가.

우리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지 40년, 광야에서 방황한지 38년만에 돌고 돌아 원점인 가데스 바네아에 다시 도착했다. 출애굽을 함께 했던 광야 1세대는 이미 다 죽은 이후이고 이제는 출애굽 1세대는 손에 꼽을 몇 사람만 살아남아 있었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정탐한 내용을 보고하자 온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어찌하여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죽게 하느냐?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원망과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38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뺑뺑이를 돌고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지칠 만큼 고생도 했는데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다. 38년이란 시간도 시간이지만 장소도 동일하게 가데스 바네아다. 같은 장소에 똑같은 실수를 세대가 바뀌어도 시간이 흘러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다.

요셉은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사람과 싸우지 않았다. 억울함을 하나님께만 부르짖었다. 단기적으로는 암담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이끄시는 길은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억울하다고 느낄 때, 사람의 생각과 다른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분의 이끄시는 방법에 대해서 억울함이 아니라 감격함을 느끼게 될 그날, 미운 너와 억울한 내가 우리의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계획이 무엇으로 어떻게 드러날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에 억울함을 억울함 자체로 받아들이고 힘겨워 하는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있다.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타인의 행동이나 말 때문에 내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국 뒤틀린 상황을 바로잡아 주시고 그것의 이유를 충분히 알게 하신 후 정금과 같이 단련되게 바꾸어 주시는 것에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아프고 힘들고 원망스럽고 배신의 상처로 얼룩진 내 심장의 고통을 주님은 반드시 풀어 주실 것이니 내가 나서서 복수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고초를 당했는지, 누가 나를 괴롭혔는지 다 알고 기록하고 계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비난에 초점을 맞출수록 우리는 점점 작아지고, 문제는 점점 커진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수록 우리는 커지고, 문제는 작아진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대꾸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는 분, 그 분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결국 나만큼 아프고 억울한 너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같은 크기의 무게를 들고 마주하고 서 있는 너와 나는 결국 함께 천국에 들어갈 형제요 자매인 것이다. 억울한 것이 무엇이냐?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