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들의 고백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우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인생이라는 종합 운동장에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다. 이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는 향방 없이 우왕좌왕 하는 자와 같다.

히브리서의 ‘구름은’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조각난 구름이 아니라 빽빽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밀운(密雲)을 뜻한다. 즉 신앙경주의 좌석은 빈자리가 눈에 띠지 않는, 안팎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허다한 관중들로 꽉 메우고 있는 경기장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의 주자로 선포되어 달리고 있다. 처음엔 낯설고 어리둥절하고 대중기피증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위해 응원하시는 분들은 로마의 검투사처럼 앉아있는 관중이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경주를 한 유경험자들이다.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 이 신앙여정을 잘 알고, 더 애착을 가지고, 더 뜨겁게 성원하고 있을 것이다.

‘증인’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신앙역사의 목격자이며 나아가 산 증인이다.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선진들이다. 우리가 달려갈 신앙경주의 선배이자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일평생을 바친 산 순교자들이다.

젊디젊은 나이에 제단에 피를 뿌리고 순교한 아벨로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다니엘, 세례요한, 예수님의 12제자와 사도바울, 스데반, 폴리갑 등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분들의 외침과 환호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활짝 열자.

혼자가 아니야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 나 혼자 당한다고 생각할 때다. 그때 범죄 하기가 쉬우며 타락하여 광야를 방황할 때가 있다. 혼자 피해를 입고 무시당하고 수치와 욕을 받는다고 할 때 마음은 삐뚤어지고 거칠어져 죄악으로 꼬이게 된다. 마귀는 그럴 때 속삭인다. ‘아무도 없다. 넌 혼자다. 아무도 널 봐 주는 사람이 없다. 너는 이제 끝장이다’라며 정죄를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으며 나를 응원하고 더욱이 나의 절대적인 편이 되어준다면 웬만한 고생쯤이야, 잠시의 고독쯤이야, 손해쯤이야, 조금 무시당하는 것은 충분히 참을 수가 있다.

우리 속담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은 단순히 무게의 경감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도우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는 뜻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 다 포기하고 싶을 때,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다고 할 때에 힘이 난다. 더욱이 내 편이 되어 성원하고 있음을 알 때에 전에 없던 용기가 생긴다.

과거 폐결핵과 전신마비로 더 이상 살 소망이 없을 때, 밥도 안 먹고 약도 안 먹고, 죽을 날만 생각하며 있을 때, ‘왜 죽으려고 하느냐, 이 어미가 있는데…’ 정신이 몽롱하여 눈을 떠 보면, 내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어머니가 계셨다.

서울에 올라와 신학공부를 하려고 해도 안 되고, 직장을 얻을 수도 없고, 몸도 아프고, 또 포기하고 싶을 때 ‘형! 내가 두 배로 일할 테니까 걱정 하지 마. 형은 살아야 돼.’ 하며 돈 봉투를 머리맡에 놓고 새벽에 일을 나가는 사랑하는 동생이 있었다. 이제는 저 위 하늘에서 성원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나님 보좌가 있는 본부석에 우리 주님이 계시고, 그 곁에 베드로 사도와 요한 사도 그리고 제자들, 그리고 많은 믿음의 거장들이 힘을 내라고 성원해주신다. 특히 나의 스승 공용복 선생님은 두 팔을 들고 연거푸 마귀를 이겨라, 세상을 이겨라, 역경을 이겨라! 하시며 열렬하게 응원하실 것이다. 살아계실 때도 자주 하신 말씀이 ‘언제나 천국보좌에 계신 주님을 늘 바라보며 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믿음이 약한 못난 제자는 누가 비방을 하면 기가 죽어서 말을 잘 못하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럴 때 마다 용기를 내라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허다한 증인들의 응원소리

보이지 않으나 나를 위하여 응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 눈앞에 있다. 억울하게 형제에게 상처를 입고 있을 때에 아벨이 일어나 응원하고 있다. 고통가운데 세상의 죄와 홀로 씨름하고 하나님의 의를 지키려 할 때에 노아가 웃으며 손짓하고 있다. 풍진세상에서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며 가난하게 살 때에 나그네 인생을 사신 아브라함이 손뼉을 크게 치고 있다. 부모형제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을 때에 야곱이 어깨를 치며 격려해 준다. 육체의 정욕 때문에 갈등과 시험이 들었을 때에 그리고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며 주저하고 있을 때에 요셉이 웃으며 먼저 손을 내미신다. 사방에서 원망 불평의 원성이 들끓을 때 모세선지자가 지팡이를 내밀며 응원하고 있다. 마음이 약하여 두려워 떨 때에 여호수아가 손을 들어 저 건너편을 가리킨다. 과거의 죄와 허물로 인해 자격 미달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시름할 때에 다윗이 어서 일어나라고 재촉을 한다. 금식에 실패를 하고 절제생활이 잘 안되어 눈물 밥을 먹고 있을 때 엘리야 선지가 큰 소리로 응원을 한다. 수도생활이 어려워 차라리 결혼하고 살까 하는 유혹에 사로잡힐 때, 프랜시스 성인이 “나도 그랬노라고.” 등을 토닥거려주며 힘을 북돋아 준다. 결승점이 바로 저기라고. 저 앞에서 면류관을 들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더 열심을 내어 달려가라고 응원하신다. 결승점에 가까울수록 하늘나라 천군천사들과 거룩한 성도들의 환호소리와 우리 주님의 박수소리가 더 우렁차게 들려온다.

죽을힘을 다해 전력질주를

이제 마지막 라운드만 남았다. 최대한 속도를 내어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 그러나 육체의 한계에 가장 치열한 싸움이 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발목을 잡는다. 그 무엇보다도, 타인과의 싸움보다도, 가장 힘들고 괴로운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라톤 선수에게 가장 어려운 상대는 바로 자신이다.

죄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무겁게 하는가?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최선을 다해 목숨이 다하기까지 싸워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전력질주를 해야 한다.

‘믿음의 주’라고 하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 선두주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온전케 한다’는 것은 믿음의 완성자 즉 마무리 주자라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달려가는 경주의 최초의 주자이시며 또한 마지막 결승점 테이프를 끊는 마무리 주자이시다.

육상의 릴레이 경주를 해 본 사람은 안다. 가장 잘 달리는 사람을 제일 앞에 세우고, 그리고 제일 잘 뛰는 사람을 마지막 주자에 세운다.

지쳐 힘겨워 할 때에 나의 배턴을 꼭 붙들고 연이어 달려주시는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 우리 주님은 달리기의 명수이시다. 얼마나 바람같이 잘 달리시는 지 구경하던 모든 응원단들도 자리에서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지르며 환호를 보낸다. 힘겹고 고단하고 긴 광야 길에 많은 이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지만, 마지막까지 배턴을 놓지 않는 비결은 오직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께만 있다.

우리 주님께서 나의 달려 갈 길을 다간 후, 주님 품에 안길 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동안 너무 수고가 많았다. 네 눈물과 아픔을 다 씻어주겠노라. 내가 건네 준 배턴을 쥐고 열심히 달렸구나. 힘들었지? 내가 잘 안다. 내가 얼마나 응원했는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네가 목마를 때 나도 함께 목말랐고, 네가 쓰러져 울고 있을 때 나도 함께 울었다. 내가 너와 함께 달리지 않았느냐? 이제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상을 받자. 함께 면류관을 쓰자꾸나. 그리고 천국잔치에 함께 참여하자꾸나.”

우리 모두 이 대열에서 낙오되지 말고 우리를 응원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힘차게 달려가자. 강한 용사여 일어나라!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노라.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