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하루는 25시간이 아니다. 태고부터 24시간으로 짜여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끝없이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한 번 죽는 것은 법칙이다(9:27). 1년 혹은 30, 혹은 좀 길게 70년 넘게 사는 시간의 길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요즘 한국은 교통사고, 암으로 인한 사망 등 죽음이 각 집안의 문턱까지 바짝 다가온 느낌이다. 젊은이, 늙은이 가리지 않는다. 사랑스런 어머니를, 3대 독자를, 결혼 3년 된 남편을, 왕도, 미녀도, 사령관도,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사람도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홍수처럼 쓸어간다.

자기 차례는 아직 멀었을 것이라는 멍청이 같은 착각 때문에 사전 준비가 전혀 없이 삽시간에 당한다. 남겨 놓아야 할 인생의 흔적도 없이, 하늘나라 보화도 저축하지 못한 채 통탄스럽게 죽어간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생무상을 노래했고, 인간은 나그네요, 행인(벧전2:11)이라고 단정 지었다. 떠들썩하던 시장거리도 저녁이 되면 사람도, 물건도 그 모습을 모두 숨기고 무거운 정적만이 깔려 있듯, 인생은 장터놀이에 불과하다. 주님께서 호출하시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그대로 놓고 가야 한다. 죽음의 차례만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기에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믿음 안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님 밖에서 살다가 육과 영이 같이 죽는 영원한 죽음을 맞아서는 안 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 꼴이 되어서도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나이까?” 하는 간절한 구도자의 자세까지 갖추었는데도 재물을 버릴 수 없어서 결국 하나님을 버린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부자의 최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널 뿐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아니한다.”는 명언도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것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선악 간에 심판하신다고 미리 경고하셨다. 나그네 기간에 세상 집이 좋아야겠는가, 천국 고향집이 좋아야겠는가? 천국 부자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는 아무 소용이 없다. 죽는 날 맨손으로 간다. 죽기 전에 미리 천국 창고에 저축하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 “내 평생 소원 이것 뿐, 주의 일하다가 이 세상 이별하는 날 주 앞에 가리라.” 주 앞에 설 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주가 주시는 면류관을 받아야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시한부 죽음을 앞둔 청년이 교회에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는 3개월 만에 죽었다. 자기 죽음을 앞둔 이 청년은 예수님의 진리를 세포에 스며들 듯 받아들여 그대로 진리로 거듭났다. 확신에 찼었고, 30년 믿어도 비틀거리는 신앙인에 견주어볼 때 이분의 신앙은 경탄할 만했다. 예수님 안에서 소망의 웃음을 띠고 죽었다. 시한부 인생! 그 각오가 있어야 신앙이 들어간다. 2개월 안에 죽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암환자의 경우 대부분 예수님을 영접하고 눈을 감는다. 우리는 2개월보다 더 짧은 5분간의 시한부 인생이 아닌가!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이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