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주일 오후에 놀이터로 어린이 전도를 나갔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정신을 온통 빼앗아버려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찾기 힘들지만, 하나님이 만나게 하실 한 영혼이 있으리라 믿고 걸음을 나섰다.

한번은 무리지어 놀고 있는 여자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얘들아, 너희들의 엄마를 누가 나으셨지?” “할머니요.” “그럼 할머니는 누가 나으셨을까?” “증조할머니요.” “그렇게 죽 거슬러 올라가면 누가 나오는지 아니?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나온단다. 그들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사람을 만드셨어.” “아닌데요. 인간은 진화된 거라고 책에서 봤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갑자기 말문이 막히기 시작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은 상상치 못했다. 내가 아는 지식을 동원해 변증해보았지만, 아이들은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엔 남자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자 한 아이가 한 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답했다. “요즘엔 하나님이 필요 없는 시대에요. 보험이 있잖아요. 보험이 우리 삶을 다 책임져주는 걸요.” 말문이 막혔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도 복음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하니 참담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담아놓은 로마서를 열며 고백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자랑하노라.’고 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을까?

사실 복음에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할 만한 요소가 많다. 대중이 환영하기에는 거리끼는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세상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라고 하지만, 복음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하다고 가르친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분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외침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상대주의가 주를 이루는 세상에서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보일 뿐이다. 과학이 최고의 학문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며 그 증거로 오래된 성경 한 권만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비논리적이며 비과학적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외침이 내안에 소용돌이친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 때문이 아니라 복음을 가지고도 능력을 상실해버린 나와 우리의 교회들.

세상이 변하면서 교회도 언제부터인가 복음에 단맛을 섞어 넣기 시작했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세상 속으로 가서 함께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무식하고 폭력적이니 문화로 다가가자며 교회 안에 세상의 문화를 들이고, 세계의 대세를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할까봐 많은 이들이 동성애 신드롬에 침묵하고 있다. 과학계와 등 돌리지 않고 지내는 법을 연구하다가 하나님이 미생물을 창조하셨고 그 미생물이 진화되어 사람이 됐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와야 당연한데, 교회는 점점 빈자리가 많아지고 문 닫는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마저도 위태롭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복음의 요소들이, 사실은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되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했을까.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싶지만, 달달한 복음에 익숙해진 입맛을 바꾸는 데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30년간 지하철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던 맨발의 천사 최춘선 할아버지. “우리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래 기다리십니다.” “예수 천당, 날마다 천당.” 투박한 메시지로 복음을 전할 때, 병이 낫고 기적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뒤집어지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맨발로 나가 복음을 전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아니 자신과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엄청난 능력을 맛보았기에 복음을 결코 감출 수 없으셨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셨던 것이다.

평생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목사님은 진리는 고독해도 날로 담대합니다.” 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삶이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그러나 그 발걸음은 복음의 능력으로 더욱 담대해짐을 고백하시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하다.

그동안 마지못해 쭈뼛쭈뼛 몇 마디 건네다가 돌아온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생각해본다. 상대방이 조금만 반발하면 금세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눈치 보던 나는 복음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세상이 복음을 부끄러워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내게 어떤 구원을 베푸셨는데, 복음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는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 한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험악한 죄악 세상 가운데서도 능력이 되실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간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