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둣빛 속에 살고 싶다

봄에는 온 들판과 산이 연한 수채화 캔버스가 된다. 채색을 시작하는 초벌 색은 연두이다. 짙은 녹음보다 여린 연두는 숲이 무슨 색이든 다 잘 어울릴 색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다른 어떤 색과도 혼합되지 않는다. 봄에 가장 먼저 숲 전체를 채색하기 시작하나 곧 다른 화려하고 강렬한 색들에 자리를 내주며 슬며시 사라져버리는 연두는, 순결의 빛이다.

순결은 봄의 이미지다. 그래서 봄은 생기가 있고, 진실하고 싶은 마음을 준다. 허나 순결이 겸손을 잃는다면 연둣빛 잎이 내쉬는 숨결에서 산소를 잃는 것과 같다. 산소를 잃은 모든 호흡은 평화를 잃고 순전한 기쁨도 앗아간다.

짙어지기 전의 저 연둣빛 속에 살 수는 없을까. 내쉬는 숨결에 산소가 가득하여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신선함을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아내기 힘든 시대에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다면 혈액 속의 헤모글로빈처럼, 겸손한 순결은 이웃을 살게 하고 단체를 살게 할 것이다.

봄의 연두를 닮은 언어는 빛의 언어이다. 주님의 빛을 그대로 받아 속살이 보이는 여린 잎처럼 투명한 언어이다. 겹겹이 숨겨놓은 가식과 불순의 칙칙한 색깔이 아니다.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으면서도 어떤 비() 진리와도 결합하지 않는 연두의 빛이다.

너희가 서로 발을 닦이게 하려 내가 본을 보였노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 높임을 받으려면 먼저 종이 되어라. 말석에 앉아라. 오직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만 기뻐하라. 저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

반면 겸손을 잃은 순결은 주장하는 아집을 친구로 두기 쉽다. 순결을 놓친 겸손은 순교의 자리에서 돌아서는 비굴이 된다. 연두는 겸손한 순결의 빛이다.

소경, 꼽추, 절름발이, 추녀의 모습으로 1287년 이태리 메톨라 성주의 딸로 태어난 말가리타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자신을 문 없는 벽돌집에 감금하고 버린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가엾게 여겨 위로해주러 온 사제에게 부끄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침에 부모님이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그 이유를 몰랐어요. 그러나 지금 알게 해 주셨어요. 예수님이 버림당하셨던 것처럼, 제가 주님을 좀더 가까이 따를 수 있도록 똑같이 해주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신부님, 저는 하나님께 그토록 가까이 갈 만큼 착하지가 않아요.”

봄의 연두는 겨우내 답답했던 대기에 산소를 마음껏 뿜어낸다. 힘겨웠던 추운 겨울을 견뎌낸 만물에 생기를 준다. 삶에 지친 이들에게 다시 살 힘을 공급한다. 거듭되는 실패로 인해 낙심한 이들에게 새로운 의욕을 준다. 부딪히는 모든 것들 때문에 절망한 마음에 다시 낮은 자리에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것이 하나님이 봄의 연두에게 주신 의미다.

겸손한 순결을 간직한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고결한 행복을 느끼게 한다. 순결한 겸손을 품은 이는 어디서나 평화와 위로가 된다. 이는 숲 전체를 포근하게 덮어가는 연두의 조물주에게 받는 감격스런 행복이다.

박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