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헤는 밤

창세기 15장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메시지는 감성과 이성을 넘어 초자연적인 기대를 갖게 한다. 한마디로 창조주만이 가능한 약속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너무나 감성적이다 못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영적인 깊이와 매력은 누구라도 그 신비한 힘에 이끌려 풍덩, 그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아브라함의 행적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이는 내가 저주를 내리리니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12:1-4)

하나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축복의 말씀을 하셨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덧붙이셨다. 떠나라는 것이다. 그것도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아무 조건이 준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떠날 준비가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아브라함의 처지는 후사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 외엔 더 바랄 것이 없을 만큼 행복한 처지였다. 착하고 아름다운 아내 사라와 넉넉한 재산도 있었고 사회적 지위 역시 지역 촌장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더 바랄 것이 없는 만족한 처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전혀 불확실한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셨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아랍 민족에게 고향, 친척, 아비는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이기에 이런 사고방식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더 처절하게 만들고 있다. 자기 동족이나 가족에게 피해가 생기면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기에 중동은 언제나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또한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세계 삼대 곡창지역의 하나인데 비해 하나님이 가라는 곳은 척박하기 짝이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여기며 아비와 친척 고향을 버리고 떠나갔다.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바로 자기 삶의 가장 확실하고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두고 그것을 바라보며 나아갔다. 확실한 것을 버리고 불확실한 것으로 향하는 그에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믿음 때문에 약속을 향해 가는 길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믿고 떠난 아브라함에겐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역경이 이어지게 된 것은 뻔한 일이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은 해보지도 못하고 풍족한 삶을 살았던 그에게 기근에 대처해야 하는 것, 아내 사라의 미모 때문에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그를 어렵게 한다. 결국 사라에게 호감을 보이는 파라오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인격적 실수도 하게 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축복은커녕 날벼락을 맞는 어려움을 겪지만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변심함이 없이 우직스러울 만큼 묵묵히 충실하기만 한 그를 주님은 ‘별’을 통해 그 믿음의 결국이 어떠할 것인지를 확인 시켜 주신다.

“하늘을 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창15:5).

그가 바라본 밤 하늘의 총총한 별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지금 그가 밟고 있는 땅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걸어온 것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더 먼 시점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하늘의 별보다 더 많게 해주시리라는 이 거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더없이 초라하며 어떻게 보면 암담하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별을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얼굴은 별이 주는 밝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별은 어둠을 비추는 희망이다. 어둠을 드러나 약속으로 변화시키는 거대한 희망의 상징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은 이후 수많은 내면의 어둠과 싸우며 자신을 정결케 한 후 믿음의 빛이 되었고, 그 자손 역시 믿음의 계보를 이루어 낸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신들만의 별을 따라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다.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별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만 현재 그 별을 바라보며 서 있는 자신의 발등을 바라보면 쉽게 절망 하곤 한다. 더 이상은 안돼, 이제는 안 되겠어, 나의 한계야, 그만하고 싶어, 이것으로 충만해. 이유는 너무나 합당하고 뚜렷하고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며 머뭇거리는 그 순간에도 별은 지지 않고 여전히 빛을 발한다. 오히려 밤이 어둡고 깊을수록 더 그 빛을 발한다. 어둠에 거한 것 같고, 하나님의 약속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은 절망 중에 있다 해도 여전히 하늘에는 빛나는 별이 떠 있음을 잊지 말라.

그 별을 따라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 경배했고, 그 별을 따라 끝도 없는 불확실함을 향해 믿음이라는 하나의 신앙으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왔다. 그들의 발길이 즐겁고 행복한 순간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회의와 번민 속에 끝도 없이 펼쳐진 머나먼 길이 고단하고 아프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표가 뚜렷했기에 절망하지 않았고 낙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별을 바라보는 내내 위로가 되어 주셨다.

약속의 별을 바라보며 나아갔던 믿음의 결국은 의로움을 낳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거룩한 인격으로의 성화가 있었다. 약속은 믿음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동기가 된다.

최종 목표는 익은열매와 성화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방법은 누구도 알 수 없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다만 우린 순종할 뿐이다. 떠나야 할 곳, 반복되는 지루함, 혹은 척박한 땅을 밟는 고통스러움. 그 모든 이유들 앞에 믿음만을 부여잡고 약속의 땅을 향해 다만 묵묵히 가는 것만이 우리의 영원한 의무다.

별을 바라보며 믿음의 견고함을 갖는 이가 있겠고, 별을 바라보며 헛된 낭만을 생산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루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하신다. 우리는 약속의 하나님만 믿고 그저 묵묵히 가야 하는 의무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왜 그런지, 왜 그래야 하는지, 묻고 싶고 따지고 싶어도 말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순교신앙, 굳건한 신앙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약속 없이 굳건 할 수 있으며 믿음 없이 순교 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세계, 막연한 세계에 대한 소망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특권을 빛나게 해준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 그리고 바라며 소망하는 가치. 그 놀라운 신비. 빛나는 별을 하나, 둘, 헤어 보지만 아직 그 별을 보고 감동하기엔 내가 밟은 땅이 너무 어둡고 척박하기만 한가. 그렇다면 잠시만 눈을 들어 하늘의 별을 헤어 보아라.

하나님은 별을 헤고 싶은 내 지친 손가락 끝에서 말씀하실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셀 수 없어서 경이롭게 떠 있는 별이 우리 주님 마음이다.

이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