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트라우마 속에 허덕이지 말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타인이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 나를 보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신 사랑이라는 명제를 가장 분명하게 실천해야 할 대상인 그들을 주님은 이웃이라 칭하셨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을 하셨다.


원인론과 목적론

알프레드 아들러의 심리학을 다룬 책 미움받을 용기를 통해 말씀에 근거한 성경적인 인관관계의 통찰력을 얻게 되었다. 아들러는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은 인간관계에서 온다고 지적하면서 그 불행의 원인에 대해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과거의 특정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그 트라우마로 인해 현재의 내가 불행하게 된 것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어떻게 과거의 트라우마적 경험이 현재의 내 삶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도록 놔둘 수 있으랴. 아들러는 명확하게 지금, 여기를 살면서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집중하라고 한다.

타인의 인정을 얻기 위한 인정욕구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남의 이목에 신경 쓰느라 현재 자신의 행복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잘 보이려고 애써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현재의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목적론을 제시한다. 타락한 인간은 흔히 자신의 어두운 치부를 숨기면서 그것이 상처와 고통이 되도록 스스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합리화시키는 한 지금의 내가 못나고 무능한 것이 내 탓이 아니라 남의 탓, 환경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불행을 합리화시킬 조건은 얼마든지 있다. 용기를 가지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라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모순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죄에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인관관계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우리를 삼키고도 남을 정도다. 흔히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인식하기 때문에 상대가 나보다 못하면 우월과 정죄의식이 발동하여 가르치고, 잘못하면 따끔하게 책망을 해서라도 바로잡으려고 한다. 열등한 상대에게 개입하여 교훈하고 책망하여 내 뜻대로 변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반면, 상대가 나보다 낫다면 그보다 못한 나는 그의 명령, 질타, 정죄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또한 나의 열등감을 자극하여 아픔이 된다.

수평적 인간관계를 가진다면 굳이 내가 개입하여 상대방을 가르치거나, 혹 잘못한다 해도 질타할 필요가 없다. 상대는 나와 대등하기 때문에 그가 충분히 자기를 성찰하고 변화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 그가 필요로 한다면 선한 도움과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사인만 보내고 결과는 주님께 맡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말을 물가로 인도는 하지만 물을 마실까 말까는 말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말의 몫인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대를 향한 우월·정죄의식은 왜곡된 자아일 뿐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본받고자 한다면 당연히 이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그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사실 우리는 남을 단죄할 자격조차도 없는 부끄러운 죄인에 불과하다. 여기서 내 눈 속에 든 들보는 우리의 영속에 뿌리박힌 타락한 육신의 소욕인 죄성과 정욕이다. 그 엄청난 것이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의 작은 허물을 정죄하는 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우리는 상대방에게 훈계,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를 물가까지 인도할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실지 말지는 상대가 결정하도록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변화시키시도록 참고 기다리는 것이 도리다.

 

합리화하지 말라

그 누구도 억지로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오직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스스로 변하려고 해야만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억지로 내가 변화시키려다 보니 상처를 주게 되고 내 뜻대로 안 되면 교만, 독선, 아집, 혈기에 지배받은 의분이 나타나기 쉽다. 이것이 수직적인 인간관계이다. 세상 주관자들의 관점을 벗어버리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다(요일2:16).

한편 내 불행의 원인을 과거의 트라우마나 현재의 환경이나 누구 탓이 아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주목하자. 속에는 내 유익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선한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나에게 협조해주지 않는다고 이웃을 원망, 정죄, 비난해서는 결코 소속감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속한 가정·교회·직장·단체·공동체에 아가페 사랑과 이타적 헌신을 해야만 소속감도 생기고 기쁨도 있으리라.

과거의 트라우마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로 인해 더 이상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말자. 내 고통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한 그 불행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용기를 가지고 내 치부를 대면하자. 핑계대지 말고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자.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충실한 현재를 살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연탄불을 피울 때 불에 달궈진 연탄이 생연탄 위에 있으면 불에 달궈진 연탄마저도 쉬이 꺼져버린다. 불에 달궈진 연탄은 반드시 생연탄 밑에 있어야만 둘 다 활활 타오른다.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내가 먼저 은혜 받고 영적으로 더 성장했다면 그렇지 못한 상대의 밑으로 내려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 주님은 가장 높은 보좌와 탁월한 영성을 가지신 구세주셨다. 하지만 천한 말구유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는 더없이 낮아지셨다.

오호라, 우리는 어찌 그리 생연탄 위에 올라 안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섬기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신 주님을 생각하라(20:28).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항상 낮은 데 처하기를 기도하자. 자원해서 타인의 발바닥 밑으로 내려가 보자. 그곳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기쁨이 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더 자아가 깨어진 만큼 주님의 겸손과 온유와 사랑을 본받아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으리라. 인간관계의 자유와 행복은 주님 안에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

이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