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 평범을 거두는 행복

최근에 한 분으로부터 비판을 듣고 계속 되새기며 억울함과 무죄함을 토로하는 자아의 소리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살다보면 많은 말들을 듣게 된다.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칭찬과 격려도 듣는 반면 차갑고 매서운 질타도 듣게 된다. 그것이 나의 부족함 때문에 생긴 지적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생긴 비판일 수도 있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잘못이라면 쓴 약이라고 생각하며 꿀꺽 삼키지만, 상대방의 왜곡된 시선 때문에 생긴 근거 없는 비판이라면 삼키고 삼키어도 또 다시 넘어오는 억울함의 구토는 멈추기가 어렵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 그냥 내가 한 만큼만 듣고 싶다는 것, 나의 논리고 누구나 생각하는 평범한 논리요 바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은 엄청난 자아였다.

이용도 목사님은 1930년대 한국 교회의 대표적 부흥사였으나 교계의 이단정죄로 오명을 쓰시고 돌아가셨다. 전국을 다니며 신앙개혁의 운동을 일으키고 수없는 신자들을 회개시키셨던 목사님을 많은 교회들이 앞 다투어 부흥사로 초청하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목사님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주의 일을 한다는 교역자들의 시기와 공격이 대단했다. 그러던 차에 결정적으로 꼬투리 잡힌 계기는 한준명 사건이었다. 소위 선지자라 하여 교계에서 정죄된 사람과 친분이 있다는 것이 목사님이 이단으로 정죄 받는 이유였다. 그와 사귀지 말라는 권고를 들은 목사님은 대답하셨다.

나는 누구든 죄인이라 해서 그를 버리지 못합니다. 나는 세상이 버린 사람, 세상에서 몰려 쫓겨나는 사람을 거두어 손잡고 살렵니다. 쫓아내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이나 나는 쫓겨난 자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울겠습니다. 나는 종종 왜 이단이 되었느냐는 말을 듣습니다. 나는 분명 이단입니다. 확실한 이단입니다. 주님의 뜻을 가장 많이 어긴 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가장 불순종한 자가 분명코 나입니다! 나는 주님 앞에 이단의 괴수입니다.’ 이 말밖에 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목사님은 잘 나가던 부흥사에서 한순간에 이단의 대표목사로 낙인찍혔다. 이 일로 인해 목사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당했다.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시던 날에는 오직 가족들만이 쓸쓸히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으신 목사님, 왜 쓸데없는 일에 나서서 그런 억울한 대우를 받으십니까? 부흥사로서의 명예와 체면도 잘 지켜야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사님의 모든 명성을 다 버릴 정도로 그 사람이 가치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왜 그런 억울한 처사에 대응하지 않으신 겁니까?’답답한 마음에 나는 목사님께 마구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은 대답 대신 기도를 들려주셨다.

, 주여! 나에게 육신의 평안과 생활의 평범을 거두어주소서. 그리고 주님께서 사신 바 몸소 받으신 고난의 생활을 나도 당해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늘의 영광과 기쁨을 얻게 하소서. , 주여! 나로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다만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불구자가 되게 하소서.”

목사님이 그토록 거부하셨던 생활의 평범은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그것이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고, 한 일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내가 원하는 평범이었다. 내가 던지지 않은 미움과 질투와 비판의 화살을 맞는 것은 평범하고 조용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짓밟는 억울한 처사라며,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는 내게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는 다시 나의 부르심을 확인하게 했다.

최초의 이단정죄를 받으신 분, 언제나 자신이 한 일에 반대되는 대접을 받으셨던 그분은 내가 따르기로 작정한 예수님이시다. 그분의 삶은 평범하기를 포기한 비범한 삶이었다. 늘 선을 행하셨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미움과 박대뿐이었고, ‘진리자체이시면서도 위선과 거짓에 치여 수많은 비아냥거림과 조롱을 당하셨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으시고 끝내는 그들의 손에 죽으신 그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되갚으신 그분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그럴 때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이같이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라”(5:11-12).

자신이 한 일에 합당한 대가만 받기 원하는 것은 평범함을 가장한 자아가 확실하다. ‘내가 인정할 수 있는 것만 말하세요. 그러면 받아들이겠어요.’이 세상 논리는 그렇다. 내가 한 일에 합당한 대우를 받는 평범한 삶을 바라는 자아 속에 감춰진 안일과 이기심을 뿌리 뽑아야 한다.

내가 곧 길이라고 하신 예수님, 그분이 가신 길을 제대로 따르셨던 이용도 목사님의 삶의 길 위에 서서 보면 이 세상에서의 평범이 천국에서의 행복과는 반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범도 결국은 넘어서야 하고 깨져야 하는 범주 안에 있다. 삼켜지지 않는 억울함도 삼키고, 자아가 아닌지도 살펴보고, 진리를 위해 받는 핍박이라면 더 받기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 부르심의 목적은 논리도 그 무엇도 아닌 예수님처럼 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박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