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시각의 차이 혹은 관점의 차이를 경험하고 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어떤 사람이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한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어떤 일이 쉽게 보이기도 하고 어렵게도 보이기도 한다. 이런 시각의 차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상이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언급한 시각이나 관점의 차이에 견줄 수 없는 엄청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 차이는 결국 생사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어떤 시각과 관점으로 믿음생활을 했느냐에 따라 결과는 영원히 결정된다. 이러한 점에서 시각과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서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현재 가지고 있는 것처럼 확신하고 보는 것이다.

교회생활을 나름대로 열심히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목사님의 설교와 교회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은혜가 안 되어 혼자 가슴아리를 하였다. 눈에 보여지는 것에 치중해 가는 교회의 모습에 서서히 지쳐갈 무렵이었다. 가정에서도 몇 년간 남편의 수술과 아들의 방황, 학교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다가 아는 믿음의 동기를 통하여  성경공부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동안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짓는 죄들도 많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속죄은총이 중요하고, 믿음이 성장해야 한다고 설교를 들었지만, 뭔가 막연하고 불분명 하고 마음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성경 공부를 하면서 빛과 어둠이 무엇인지, 영적 행실과 육적 행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선명한 말씀의 빛이 들어오면서 새롭게 진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마치 소경처럼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이 희미하고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해왔었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이제라도 진리의  빛 가운데서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구석구석 살피며 철저히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 감격해 하셨다 

성경에는 영적인 시각과 관점으로 보지 못하고 오판을 내는 경우가 많이 나온다. 열왕기하 6:15-18절에 보면 아람군대가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사건이 나온다. 아침에 일어난 사환 게하시는 수많은 아람군대가 이스라엘 지경을 에워싼 것을 보고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라며 두려워 떨었다. 그때 엘리사는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게하시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달라고 하였다. 육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로 눈앞에서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의 놀라운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같은 장소, 같은 것을 보아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는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민수기 13:28-29절에도 보면 가나안을 정탐하였던 열 두 명은 그들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보고하였다. 열 명은 그 땅 거민이 강하고 크고 성읍도 견고한 것을 보고, 그들에 비해 이스라엘 자손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반면 두 명은 아낙 자손들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며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했다. 사환 게하시도, 열 명의 정탐꾼도 모두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했기에 생과 사를 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떴던 사도 바울 역시 그 빛을 받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진리를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으셨다. 프랜시스 역시 거룩한 빛을 본 후 일평생 가장 가난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철저한 청빈생활을 하시며 회개의 삶을 일관하셨다.

세상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약해져가고 선과 악이 불분명한 오리 무중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빛이 밝고 선명한 진리가 필요한 때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간교한 마귀가 세상의 기복적인 사상으로 코를 베어가는 시대가 되었다. 빛과 어둠을 선명히 드러내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증거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여, 영적인 분별려을 주시고 무엇보다 주님의 관점으로 보게 하소서.”

이정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