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린 아이랍니다.


에서와 야곱이 연상되는 쌍둥이 아이들이 몇 달 전부터 주일학교에 나왔다. 처음에는 두 아이를 구분하기가 참 쉽지 않았다. 에서처럼 털이라도 숭숭 나고 남성다운 근육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옷도, 머리 모양도, 행동도 엇비슷해서 자주 헷갈리곤 했다.

그들의 친한 친구들은 눈빛을 보고 구분한다는데 난 영 신통치가 않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조금씩 구분이 되었다. 동생의 얼굴은 약간 가름하고, 언니는 약간 둥근형이었다. 혹여나 엉뚱한 이름을 부를까 하는 마음에 수첩을 꺼내들고 이름 옆에 가름이라고 표기를 해 놓았다. 좀더 지나다 보니 식성이나 좋아하는 놀이도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주 오후에는 그 아이들이 내 옆에서 종달새처럼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중 할머니는 이제 괜찮으신데, 엄마만 교회 가는 거 반대해요.”라는 말에 나의 귀가 솔깃했다. 심방을 하고자 엄마가 좋아하시는 과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쌍둥이 중 언니가 자두라고 하면서, 신과일은 다 좋아하신다고 하였다. 옆에 있던 4학년 남자아이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자 저희 엄마는 자몽을 좋아하셔요. 쓴데 맛있다고 하셔요. 참 이상해요.”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옆에 있던 쌍둥이 중 동생도 맞아요. 어른들은 참 이상해요. 몸을 두들겨주면 아프다고 하지 않고, 시원하대요.”라며 맞장구를 쳤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편안한 삶에 안주하고 있는 나의 영혼을 주님께서 깨우시는 듯 했다.

아이들은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이 상하면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잘 드러내고, 꼭 되갚음을 해야 마음이 풀리는 경우를 곧잘 보게 된다. 그리고 고통을 잘 못 참는다. 조금만 어딘가에 부딪혀도 아프다고 아우성을 친다. 선물을 받거나 간식을 먹을 때도 다른 아이들과 모양이 조금 다르거나 양이 적으면 토라지거나 시샘을 잘 한다. 어떤 일에 싫증도 금방 느낀다.

돌아보니 나도 아이들과 닮았다. 애매한 고난을 받으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반문하며 투덜거렸다. 누군가가 내게 아픔을 주면 상대방에게 꼭 앙갚음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꺼리는 일들이 주어지면 손사래를 치며 도망치곤 하였다. 자그마한 고통이 닥쳐도 아프다고 아우성을 쳤다. 누군가가 조금만 더 잘 되는 것 같아도 은근히 상대방을 비방하며 깎아내리기도 하였다. 나의 얕은 이성과 경험의 잣대로, 단단한 음식을 드시는 장성한 믿음의 어른들의 행동양식과 삶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시기와 분쟁을 보고, 어린 아이들과 같은 너희에게는 밥이 아닌 젖으로밖에 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아직은 난 영적으로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 단단한 음식보다는 부드러운 음식이, 고난보다는 굴곡 없는 평범한 삶이, 끊임없는 인내가 필요한 광야보다는 이 세상이 좋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식을 줄 몰랐던 장성한 믿음의 어른들은 하나님이 주신 고난을 가벼이 여겼다.

24살에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돌아가셨던 소화 테레사의 말이다. “나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육신의 고통과 영적 고통이 몇 해를 끌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나는 고통 속의 오랜 삶도 두렵지 않고 싸움도 사양치 않겠습니다. 주는 피난처요, 싸움을 가르쳐주시는 지도자시고 보호자시니, 나는 주를 굳게 신뢰합니다.”

19591월 말, 독일 마리아 자매회를 창설한 바실레아 쉴링크는 심장의 상태가 너무 위급하여 몇 달 동안을 죽음의 문턱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종종 하나님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큰 고통 가운데 휩싸여 있었다. 내적으로도 죽음의 계곡을 지나고 있었다. 극도로 약해져 있어서 말하거나 움직이지도 못하고 심지어 글씨를 쓸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려운 기간에도 겨우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일기에 써 넣었다. “, 아버지,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사랑을 믿습니다. 제 자신을 고난에 맡깁니다.”

이후 병에서 회복된 그녀는 자매들과 함께 고난의 찬가를 불렀다. “와서 온 마음을 다해 고난을 찬양할지어다. 그것에는 바로 영원의 세계와 이 세상에서 나눌 기이한 기쁨이 있으니.”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권고가 여전히 말하는 것도, 깨닫는 것도, 생각하는 것’(고전13:11)도 어린아이와 같은 나를 흔들어 깨운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운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고난이 네게 유익이라.” 사도 바울의 고백은 진실로 우리 모두에게 진리다. 믿음의 어른들은 고난을 달게 여겼다. 그들은 연신 두들겨 맞아도 아프다고 아우성치지 않는다. 도리어 영혼의 시원함을 느낀다. 쓰리고 아파도 묵묵히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쉬운 것보다는 어려운 일을 늘 선택한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고난 받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11:25). 기근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칼이나 위험이나 그 어떤 고통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모든 인류 구원의 머릿돌로 세우시고자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셨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시는 징계의 채찍질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고 하였다. 이는 참 아들의 증거이기에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시험의 불은 이상한 불청객이 아니다. 이는 주님과 더 깊은 영적 만남의 통로이기에 더없이 반가운 손님이요,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새기는 은혜의 인두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함을 잊지 말자. 열정과 고난은 동일선상에 있는 단어(passion).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크면 클수록 고난도 크다. 하지만 열매는 그만큼 달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에게는 고통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사랑하는 주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길이기에 말이다.

믿음의 어른들처럼 투정부리지 않고 고통 중에서도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님의 피 묻은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을 뵙는 그날, 내 몸에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명책에 나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시고 이 철부지 어린 딸의 마음과 행실을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나는 그분을 믿는다. 그분의 모든 행하심을 신뢰한다. 더 즐겁게 그분이 펼쳐 놓으신 길을 걸어갈 것이다. 착한 아이가 되어서.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