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 보이지 않나요

이혼의 증가로 결손 가정이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20살 초보교사에서부터 전도사로 어린이사역을 하면서까지 유난히 내게 결손가정 아이들을 많이 붙여주셨다. 친척 집에 얹혀사는 아이, 문화적 차이로 아빠와 헤어져 엄마하고만 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 병약하신 할머니 손에 키워지는 아이, 가정의 불화로 상처를 입어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아이, 엄마아빠 두 분 다 농아이거나 지체장애를 가지고 계신 아이 등. 사실 나에게도 7살 때 엄마를 잃은 어린 조카의 눈물과 아픔을 보았는지라 이러한 아이들에게 더 시선이 가기도 했다.

주일에 엄마와 떨어져 사는 1학년 남자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겨울바람이 살갗을 제법 매섭게 때리는데, 먼발치 계단 위에서 티셔츠 하나만 달랑 걸쳐 입고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반가움에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아이가 음료수 한 컵만 마시고 갈게요.’ 하며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어 집에 와도 괜찮다는 말에 문을 살며시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거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이불과 설거지를 하지 않아 쌓인 그릇들이 보였다. 아빠는 일찌감치 일을 나가시고 할머니마저 병원에 계시니 마음이 괜히 짠했다.

음료수를 컵에 따라준 후 혹시 설거지해도 되겠니?”라고 물어보자, “.”라고 짧게 대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인지 말라붙은 밥풀과 반찬 양념들이 잘 씻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박박 문질러 설거지를 끝내고 현관문으로 나오는데, 무언가 끈적끈적한 게 달라붙었다. 아이가 자신이 어제 오후에 쏟은 음료수라고 하였다. 엷은 분홍빛 액체가 바닥 이곳저곳에 엉겨붙어 있었다. 왠지 여기저기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이의 쓸쓸한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듯 마음이 아팠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이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와우! 전도사님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말했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다 하면 에이! 우연이지요.’라고 하던 아이가 뜻밖에도 그런 말을 했기에 차가운 바람마저 훈훈하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에는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며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유치부 여자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아이들의 이런저런 주문에 응대하며 물을 떠주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 계시던 권사님이 애기들 챙기느라 엄마가 정신이 없지.”라고 하시었다. 오늘따라 엄마라는 말이 왠지 싫지 않았다.

얼마 전 천상의 엄마라는 영상을 보았는데, 보는 내내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부산시 암남동에 자리한 마리아수녀회의 일상을 담은 내용이었다. 그곳에는 수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80여명의 수녀들이 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수도자가 아니라 엄마. 그녀들이 키우는 600명의 아이들 때문이다. 생후 1개월이 된 아기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8살 아이까지.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를 돌보기 위해 설립된 마리아수녀회는 일하는 수도회, 고생하는 수도회로 알려져 있다. 수녀들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 마리아수녀회를 선택했다. 수녀가 되겠다고 집 떠난 딸이 아이들 빨랫감에 묻혀 사는 모습을 본 부모님이 집에 가자고 손을 잡아끌기도 했다. 아기를 업고 안고 다니니 수도자 망신시킨다고 질타를 받기도 했다.

유치부 수녀들은 회색수도복을 휘날리며 틈만 나면 아이들과 뛰어논다. 수녀 한 명과 보육사 한 명이 돌보는 아이들은 평균 10명이다. 그러다보니 씻기고 입히고 먹이느라 하루종일 쉴 틈이 없다. 아이들은 이런 수녀를 엄마라고 부른다. 엄마 수녀도 자신들이 불리는 호칭 엄마를 사랑한다. 모든 젊음을 이곳에서 불태우고, 50년이 흘러 그 젊디젊은 수녀들이 이제 노인이 되었어도 그 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굽은 허리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수녀에게 행복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도리어 행복해 보이지 않나요?”라면서 활짝 웃으신다. 그들은 말한다.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의 삶이 그러하듯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고생이 아니라 삶이었습니다. 아이 키우는 은총을 받았는데, 달리 무엇을 원하겠어요. 다시 젊어져도 아이들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어요. 이러한 삶으로 저를 선택해주신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려요.”

그분들의 고백 앞에 내가 너무나 부끄러웠다. 몇 달 동안 내 안에는 불만이 가득했었다. 영아부와 유치부 아이들을 돌보면서 주일예배를 계속 드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야지 하다가도 내가 아이들 보모도 아니고, 하루종일 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밥 먹여주고 놀아주려고 왔나?’하는 생각이 울컥 치밀어 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그곳의 수녀들은 나와는 달랐다. 노수녀들이 굽은 허리로 아이를 등에 업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축구공을 차고, 칭얼대고 엉겨붙는 아이들을 밝은 표정으로 하나하나 다독거리며 사랑으로 보살피고 계셨다.

무지한 나는 어리석게도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잘 가르치는 탁월한 전도사보다도, 몸으로 뛰며 사랑과 희생과 겸손과 인내로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의 마음을 갖기 원하심을 말이다. 부대끼고 나를 힘들게 하고 찔러대는 수많은 가시들이 실은 나의 영혼을 살리는 은총의 가시였음을 말이다.

엄마로 불리기에는 영육 간에 함량미달인 이 죄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 언제나 주님은 나를 자궁 속에 품은 아이처럼, 가시더미 속에서도 붉은 피를 흘리시며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자애롭게 품어주셨다. 쉴 사이 없이 투덜거리며 엉겨붙어도 단 한 시도 귀찮다고 뿌리치지 않으셨다.

산고를 겪어본 적이 없는 나를, 하나님은 이 광야 길에서 마음의 닦달질과 고통과 아픔과 수치를 맛보게 하시면서 엄마의 마음을 가르치고 계셨다. 때로는 소박맞은 부끄러운 여인마냥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연약한 나를 주님은 단 한 번도 포기치 않으셨다. 정말 그러했다. 나에게 아이들을 섬기도록 선택해주신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다.

마더 테레사(Mother Theresa, 1910-1997)가 잠들어 있는 마더 하우스에 걸린 나무 문패에는 아직도 마더 테레사라는 글씨가 적혀 있고, ‘자리에 있음자리에 없음을 나타내는 표시에 늘 자리에 있음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나 비록 구로치 못한 자일지라도 사랑을 낳는 여인으로, ‘자리에 있음이라는 문패를 걸어놓고 아이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마더 하우스로 서 있고 싶다.

낮은 동산에서 진정한 어머니로 빚어가실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에 난 정말 행복하다.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세상 구석구석은 향기로움과 다정함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