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고향을 찾아서

bfb5bcbac8c6b7c3.JPG아침 식사를 하는데 한 형제님이 설에 고향을 다녀오겠다고 하였다. 모처럼 가족들을 만나니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고 복음도 전하면서 잘 다녀오라고 하였다. 가진 것이 별로 없기에 여비는 있는지 물으면서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든다.

선물을 한 꾸러미 들고 고향에 가는 귀성객들을 보면 섬진강 나루턱에서 우리 아들 언제 오려나?’ 기다리시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설이면 동구 밖에 빈 경운기를 몰고 나와 어언 30년을 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혹시나 아들인가 하시며 해가 질 무렵까지 기다리시던 아버지 얼굴도 떠오른다. 수수부침 부쳐놓고 굽은 허리로 뜰을 서성이시며 못난 아들을 기다리실 아버지. 불효자식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만, 더 나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아버지에게 진실한 마음을 담아 영혼의 편지를 띄워본다.

아버지 그만 들어가세요. 오후에 저는 성경 공부하러 가야 돼요. 그리고 저녁에는 대전교회에서 집회가 있어요. 기다리지 마세요. 우리에게 더 좋은 본향이 있잖아요. 잠깐 만났다가 헤어지는 그런 만남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더 좋은 고향에서 영원히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을 가지고 그곳에서 함께 살아요.”

잠시 동안 이 땅에 머물다가 본향으로 돌아갈 인생 무엇에 그리 연연할 것인가. 하숙생과 같은 우리의 인생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한다. 어느 누가 이 땅에서 그렇지 않다고 항변할 수 있겠는가. 생명의 연수가 길어졌다고 하지만 100년 안팎의 인생인데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고 큰 소리 쳐보아야 얼마나 갈 것인가. 한을 품어 본들 얼마나 기막힌 사연이 되겠는가. 저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다 아침 안개와 같이 쉽게 사라질 것이다. 인생의 영광이란 것도 알고 보면 풀의 꽃과 같이 금방 시들어질 따름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순종함으로 친척과 아비와 본토를 떠나 약속의 땅, 본향을 향해 나아갔다. 남들이 금은보화를 차지하고 기름진 동산, 푸른 초장을 자랑할 때에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단을 쌓고 자신의 장막을 족한 줄 알고 스스로 나그네처럼 사셨다. 겨우 육신 하나만 묻힐 무덤 하나만 남겨둔 채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다. 부인 사라도 하늘의 별 같은 자손을 살아생전 보지 못하였으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혈혈단신 이삭만을 남겨 둔 채 더 나은 고향으로 가셨다. 이삭도 우물을 빼앗기고 쫓겨 다니면서도 불평 없이 온유함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블레셋 종족들 사이에서 평화를 이루고, 두 눈이 멀어버린 큰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었다. 후일 이스라엘이 된 야곱도 천리 길을 전전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서도 낙남하지 않은 것은 약속의 땅 본향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곱은 애굽 왕 바로를 축복한 후에 자신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입니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는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 자신도 모두다 나그네임을 고백하고 있다. 몇 달 전에 헤브론에 잠시 들러 그분들의 무덤을 보았는데, 인생의 허무함과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저 하늘나라 본향임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벧전2:11)라고 권면을 하셨던 사도베드로의 말씀처럼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행인과 나그네와 순례자이다. 더 나은 본향을 찾아가는 귀성객과 같다.

종교성이 뛰어난 한국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닮은 점이 많다. 마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대인처럼 고생을 사서하더라도 반드시 고향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민족이다.

도로가 막히고, 고향길이 멀더라도 귀향행렬은 그치지 않는다. 고향이 북한이라면 임진각이라도 간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다. 2세기 이집트 고위 관리가 수신인으로 되어 있는 한 보고서에는 기독교인의 귀소본능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현지의 규범, 관습, 언어, 의복, 음식 등에 잘 적응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귀소본능을 얘기하자면 원래 고향은 하늘에 있다(11:16). 이 땅에서는 잠시 머무는 외국인이나 나그네로 사는 것이다(11:13). 믿음으로 살면서 좀 힘들고 고생스러우면 어떠랴, 고향 가는 길인데. 즐겁고 기쁜 설이 되기를 기원한다

본향은 영어로 아버지 나라’(father-land)이다. “더 좋은 고향 땅”(better home land)을 영어 성경에서는 더 인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늘에 속한 더 없이 그리운 곳이어라”(heavenly and more desirable). 우리가 갈 본향은 더 없이 그리운 곳이다. 슬픔도 눈물도 애통도 고통도 없는 영원히 행복과 평화가 가득한 나라이다.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는 더 좋은 본향에 새 하늘과 새 땅, 새 성품, 신령한 몸, 새로운 만물 등을 준비해 놓으시고 더 좋은 세계를 우리가 향유하기를 원하신다.

사도 바울도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며 육신(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덧입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자이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 정결케 되어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그날에 이르러 우리 주님께서 어서 오라, 사랑하는 내 아들아!” 두 팔을 벌려 가슴에 꼭 껴안으시고 환영하실 것이다. 나의 모든 눈물을 다 씻어주시고 흰옷을 입혀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어머니가 준비해 놓으신 수수부침보다 더 맛있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는 생명과를 먹으면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그 나라에서 살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 싶은 분들이 많다. 그리운 선생님,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막달라 마리아, 성 프랜시스, 스데반 집사님. 벌써부터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생전에 뵙지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은혜를 베푸신 고마우신 분들도 모두 그곳에서 꼭 만나 뵙고 싶다. 얼마나 설레고 기대되는 만남인가. 내 본향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박희진